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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51

가야 역사, 5세기 기생반숙례 반란 사건 전반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역사, 가야역사에서 5세기 말 487년, 한반도 남부를 뒤흔드는 사건과 한바탕 활극이 펼쳐졌다. 해석에 따라서는 찻잔속의 태풍일 수도 있는 사소한 사건으로 보기도 하고 한국 사학자들은 역사가 아닌 조작 설화라고 일방적으로 보기도 한다. 관련 국가들은 당시에 한반도에 있었던 모든 국가들, 고구려,신라, 백제, 임나가라, 왜가 모두 등장한다. 주인공은 키노오이와수쿠네(紀生磐宿禰, 기생반숙례)이다. 가야계 왜인인지, 백제계왜인인지 마한계인지, 그냥 왜인인지 불명확하다. 기紀는 발음이고, 뜻은 나무 木씨이다. 숙례, 수쿠네는 카바네(姓)이기 때문에 “키오이” “키오이와”로 생략해서 부른다. 백제에서 목씨는 마한계통 귀족 성씨라고도 한다. 일단 22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465년 3월 ..

역사이야기 2022.06.15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1

원균 맹장론, 원균 옹호론 유감 KBS 불멸의 이순신에서 원균과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로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선배 장군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최재성이 연기한 원균은 희생양, anti-hero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그려진다. 전투 전에 이순신 장군에게 조언을 하고, 나름 대로 용맹한 육전에 능하고, 조심조심하는 이순신에 대해 호기롭게 어택 attack 할 것을 주창한다. 순전히 허구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연기 잘한 최재성까지 욕 얻어 먹었다. 원균에 대해 맹장론은 그렇고, 적어도 싸우다 전사했고 조선왕조가 인정한 공신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조금씩, 역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명분으로, 스멀스멀 원균옹호론이 퍼져가고 있던 적이 있었다. 원균에 대해 적극적 찬사나 소극적 옹호..

역사이야기 2022.06.09

임나가라, 임나(任那)의 뜻은?

한국 고대사에서 임나가라는 항상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엮어서, 이야기하기 싫은 실체였다. 우리 사료에서 분명하게 등장하지도 않은 데다가,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경영했다는 일본쪽의 주장과 연결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와 관련된 풍부한 기사들에 대한 연구는 점진적으로 임나가라, 가야의 별칭이거나, 특정 가야 소국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쨌든 한국 사학계의 다수설은 임나가라가 금관가야, 김해가야, 또는 그 연맹체일 것으로 보고 있다. 임나는 무슨 뜻일까? 任那에서 임은 맡길 임자이고, 나는 나라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맡긴 나라이다. 누가 누구에게 맏긴 나라인가?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백제가 맏긴 나라다라고 하는데 누구에게 맏긴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역사이야기 2022.06.04

구야, 가야, 가라, 임나, 미마나

사타, 모루,상다리, 하다리, 상기문, 하기문, 고차국 탁기탄국 안라국 졸마국 다라국 반파국 탁순국, 자타, 걸손, 졸마, 사이기 전기 후기 나누지 않고, 현재 경상남도 낙동강 서쪽부터 전라도 섬진강변에 1세기~6세기에 걸쳐 있던, 가야라고 하는 나라들의 이름들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쟁패 과정에서 명멸했던, 우리에게 거의 잊혀진 이름들이다. 가야 하면 금관가야와 대가야 6가야만 외웠던 국민들에게 생소하다. 그런데 이름들이 정겹지 않은가? 상다리 하다리... 한반도 남부지역을 여행해 보면,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 산과 강과 들판이 조화를 이루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느낀다. 정확히 고대 사회 농업생산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 나라당 인구 4~5만에서 10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

역사이야기 2022.06.03

함무라비 법전으로 읽는 고대 사회

3800년 전 당당한 세상의 지배자로 이 법전이 완공되었을 때, 함무라비 대왕의 기분은 어땠을까. 함무라비 대왕은 약자와 평민을 배려하는 정의의 지배자로 공공의 이익과 행복의 수호자로 자신을 기록한다. 서문에 기록된 것처럼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실제로도 그러하겠지만 법 조항을 보면, 각종 재판의 기준 판례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어, 각종 민사분쟁과 형사 처벌과 관련해서 온갖 쟁송을 자신이 다 할 수는 없는 법. 자신의 업무를 지방관들에게 나누어 주어, 좀 편하게 생활하고자 하는 목적이 들어 있다고 보여 진다. “재판을 받으려는 자는 이 비 앞에 와서 그것을 읽고 들어라.”고 하는데, 그 당시 문자 해독률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관리와 귀족, 그리고 부유한 평민들 정도 글자를 알았겠지..

역사이야기 2022.06.02

삼국통일의 의의와 한계

교과서적으로 삼국통일은 통일신라 이래 1300여 년 한반도의 통합된 국가 형태를 형성하고, 공통의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였다고 설명한다. 다른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민족 자주성을 지키고 저항하면서 독자적인 민족 문화와 체제를 존속시킨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즉, 신라의 삼국 통일은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융합하여 단일한 민족 문화 형성의 계기가 되었으며,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자주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한 이른바 삼국통일은 '불완전'하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신라의 통일이 대동강 이남의 땅으로 한정되었다는 비판 또한 대당항쟁의 능력의 한계에서 결과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신라가 ..

역사이야기 2022.05.28

양칠성, 야나가와 시치세이, 코마루딘

역사가 커브를 틀 때면, 대다수 지식인들은 기차에서 떨어진다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던가. 또한 민중들의 기구한 삶 또한 그렇지 않았겠는가. 일제 식민지 통치 기간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투쟁 저항하고, 어떤 이들은 떠나고, 어떤 이들은 일본인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하거나, 적극 협조하기도 했다. 역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은 편집하는 사람들의 기억이다. 역사학자의 기억이다. 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집단의 기억 편집일 수 있다. 그 집단의 편집된 기억 속에서 가끔, 공인된 역사에서 탈락하거나, 애써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는 기억들이 불쑥불쑥 삐져나오기도 한다. 조센징, 반도인으로 멸시 받으며 정식 일본군도 아니고, 군무원 감시원으로 남방으로 반지원 반강제로 끌려간 ..

역사이야기 2022.05.26

역사는 진보하는가

진보한다는 것은 과거의 시대에 비해 점차 나은 방향으로 진행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 인류 역사를 뒤돌아보았을 때, 역사는 분명 발전하고 진보해 왔으며, 앞으로도 진보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간 사회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역사에 반영되었다는 믿음이자 반영될 것이라는 신념이다. 자연과 역사는 다르다. 역사는 인간 내면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정신활동의 결과인 반면에, 자연은 외부 인과율에 따라 지배된다. 즉, 인간의 정신과 이성은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다. 자연은 주기적 순환과정이요 반복적이지만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나선형적으로 발전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와는 달리 인간노력의 역사이기 때문에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며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바탕..

역사이야기 2022.05.24

고구려 신라 백제는 말이 같았을까 2 (일본어의 뿌리는?)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수묘인, 즉 묘를 지키고 관리할 사람으로 예인과 한인으로 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복지에 거주하는 사람을 예인 한인으로 기록하는바, 농사를 잘 짓는 이유로 수묘인으로 삼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예인과 한인으로 이루어진 백잔이란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만주와 한반도 5세기에 말갈과 왜인, 신라인들이 있었고, 그 2~3세기에는 낙랑과 대방에 와있던 중국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말갈은 툭하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침략하는 존재였고, 때로는 고구려가 말갈을 대동하기도 하거니와, 때로는 독자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는 집단이었다. 예인, 한인, 말갈인, 왜인, 중국인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이들의 언어가 같지 않았을 것이다. 집단과 집단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아무래도 쓰는 언어와 습속이기 때..

역사이야기 2022.05.22

고구려 신라 백제는 말이 같았을까. 1

한참 오래 전에 서울대 입학 구술문제로 출제된 적이 있는 질문이다. 일단 같은 한민족이라고 전제하에 문화적 공통성, 중국 측 기록, 세 고대국가인이 만난 기록을 가지고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백제 성왕의 아들 여창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와 통성명하는 과정에서 성이 같음을 밝히고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 사무라이들의 전통이 전투전에 이렇게 통성명을 한다는 것이다.) 또 장수왕 첩자 도림이 백제 개로왕과 바둑을 두는데, 통역하면서 두지는 않았을 것이고, 도림이 백제어를 유창하게 학습했을 것 같지도 않다. 신라도 중국왕조와 백제 통역을 빌어서 교류했다는 기록을 보면 지리적으로 붙어있는 신라와 백제인들 간에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을 것 같다.일본서기에도 신..

역사이야기 202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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