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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51

큰나라 백제와 일 후왕, 그리고 한일관계

사마는 우리말로 섬이다. 현대일본어에서는 시마(島)이다. 이 사마왕이 무령왕, 그리고 왜왕 무일까. 역사학계 소진철 교수는 그렇다고 본다. 478년 왜왕 무(武)는 송나라 순제에게 상표문을 보낸다. 상표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백제는 지금 고구려 때문에 괴롭다. 백제와 송나라를 왔다 갔다 하는데 방해가 되는 세력이 고구려다. 그 고구려 침략에 결연히 싸우고자 했더니, 갑자기 아버지와 형이 죽게 되어 상 중에 있게 되었다. 이제 때가 되어 적을 무찌르고자 하니 도와 달라. 뭐 이런 내용이다. 무령왕이 461년 생이니까. 18세 청년의 나이이다. 왜왕 무가 무녕왕이 맞다면 그렇다. 475년 위례성의 함락, 아버지와 형의 충격적인 죽음, 혈기가 넘치는 나이에 그 어쩌지 못함을 분하게 생각하면서 상복을 입고 복..

역사이야기 2023.03.17

걸출한 동성왕의 활약과 무령왕

동성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는 안정을 찾는 것 같다. 패배와 패전, 왕의 죽음을 딛고 절치부심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걸출하다고 평가받는 동성왕은 487년 키노오이와수쿠네(紀生磐宿禰, 기생반숙례) 반란을 가볍게 진압하면서 가야세력이 동부 전라 지역에 세력을 뻗치는 것을 저지할 뿐 만 아니라 가야에 대한 일정 영향력을 계속 유지 했을 것이다. https://peursen.tistory.com/77 참고. 그리고 498년 옛 마한 땅에 대해 지배를 다시 공고히 한다.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그 외에 군대를 사열하고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며, 신라와 동맹을 맺고, 서로 도움 주며 고구려군에 대항했다. 미스테리한 역사 기록, 삼국사기 동성왕 10년 488년 기사에 의하면 북위가..

역사이야기 2023.03.16

가수리군과 군군, 말다왕과 사마왕

왕이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흔치 않는 일이 백제에는 두 번이나 일어났다. 한번은 고구려 장수왕에 의한 개로왕 처형, 두 번째는 신라 진흥왕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백제 성왕이다. 패전을 한것도 모자라, 왕이 적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은 살아남은 왕족과 귀족들은 어떤 느낌일까. 모든 것이 비상사태, 알람이 울리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 적에 대한 적개심, 증오는 국가정책을 운영하는데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다. 475년 장수왕의 7일간 공략으로 한성백제가 망한 날, 개로왕 가수리군은 지금의 아차산, 힐튼호텔 근처에서 과거 자신의 신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 의해 처형당한다. 뿐만 아니라 태후, 왕자들 직계 가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고국원왕의 ..

역사이야기 2023.03.14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군대가 불러일으킨 정치 변동

어떤 이는 말한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하고 신라를 구원하면서 한반도에서 왜병을 쫒아내고, 덤으로 가야 제국을 무력화 시켰을 때,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글쎄. 광개토대왕이나 그 당시 고구려인들 입장에서는 이미 한반도 통일, 제패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나의 정치체를 아예 없애는 비용, 적당히 인정하고 이용하는 기회를 생각하면 고구려 제국에 편입된 속국으로 백제와 신라를 인식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신라는 고구려 속국이 된 상태고, 백제는 같은 부여족이 지배층인데다, 그 경기 충청 호남 지역의 그 생산력에 비례하는 힘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완전히 굴복하고 정복하기에는 고구려의 힘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행보, 야마토 정권을 단순히 군대와 ..

역사이야기 2023.03.13

고구려의 1차 남진과 왜국의 백제 속령화

낙랑과 대방의 멸망 이후 4세기 근초고왕 시기에서 백제와 왜의 첫 교섭, 그리고 7세기 663년 백촌강 전투까지 이 땅 한반도와 열도 사이는 뜨거웠다. 그 사이에 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사이의 이합집산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한국 교과서에서 정답처럼 외우는 각 나라의 전성기는, 백제는 4세기, 5세기는 고구려, 6세기는 신라가 전성기였다. 일단 4세기를 관통하는 야마토의 왕은 인덕천황인데 생몰연대로 따지면 257년생, 399년 졸이니까. 142세를 살았다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쨌든 오사카시에 있는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 무덤의 주인공으로서 오사카 교토 지역의 경제개발, 농지확보등의 업적이 있는 인물이다. 알다시피 근초고왕은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왕 고국원왕을 전사시..

역사이야기 2023.03.12

신공황후의 전설과 한반도 3

역사책, 사서는 일정한 관점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그 어떤 사건, 인물에 대해 바라보는 기준이 있다. 그 유명한 사기에서 사마천은 공자님의 입을 빌어서 말한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혼탁한 세상에 대한 이유와 원인, 그리고 평화롭고 편안한 삶에 대한 의지, 시대와 사회의 큰 변화의 틀 내에서 아침이슬처럼 사라질 한 개인들의 이전투구 속에 담긴 진리를 담아낸다. 선하고 의로운 백이 숙제와 같은 이들이 안위를 누리지 못한 것은 불행이라고 바라본 냉정한 시각을 유지한다. 술이부작(述而不作), 공자님이 세운 역사 서술의 원칙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역사서술에 대한 의지는 랑케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대한 추구와 겹친다. 과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서술, 설명, 탐구가 역사가 개인의 가치..

역사이야기 2023.03.10

신공황후의 전설과 한반도 2

신의 아들은 만들어진다. 이집트 태양신 라의 아들 파라오,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알렉산더대왕, 중국의 황제, 절대 권력을 추구한 이들의 공통점이다. 신의 아들이 있다는 생각은 이미 로마 황제들도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바, 예수님이 그 시작은 아니었다. 어쨌든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생각, 그러한 관념의 필요성은 스스로 존중받을 힘이 내게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은 강한 권위와 힘에 복종하라는 의미였다. 또는 황금씨족이라고 우기는 징기스칸의 후예인 몽골 지배계층, 성스러운 뼈다구 내지 진짜 뼈다구라고 성골 진골로 권력의 정통성을 우기는 신라 지배층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새기는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하얀뼈, 검은뼈로 혈통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은 몽골 초원의 전통인 것 같은데,..

역사이야기 2023.03.09

신공황후의 전설과 한반도 1

일반적으로 왕과 귀족이 한 사회 내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실력으로 원정을 성공시키고, 약탈을 능숙하게 지휘하면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무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내기 위해 무모한 도전과 원정, 싸움에서 비겁하지 않을 것을 강하게 요구받았다. 많은 영웅들, 그들은 대체로 어떤 집안, 가문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을 것이고, 혼인 등으로 유력자 집안들을 회유하거나 협력, 복종의 여러 정치 기술을 습득했을 것이다. 3세기의 인물 신공황후의 역사기록은 대화족 야마토의 한반도 진출을 기술한 내용이다. 일본서기에는 남장을 해서 신라 정벌을 한 것으로 나온다. 겨울 10월 己亥 초하루 辛丑 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중략,,,,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

역사이야기 2023.03.08

반일과 친일, 4박자 엔카와 트롯

일본 제국주의 통치는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인적 물적 피해도 엄청났지만,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기반으로 한 식민지가 아닌 동화의 대상, 민족 말살이었기에 세계사에 유래 없는 폭압과 강요로 수 천년간 형성 유지 되어온 민족적 자부심은 붕괴되었다. 몽골제국에 편입되었을 때 조차도 고유의 언어와 습속,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상전으로 모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깡패인데 무식한 오랑캐에 대해 그다지 모멸감을 느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은 단순히 국가를 우리 힘으로 운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반일주의 감정은 경제적인 수탈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본의 아니게 섞여 살면서 2등국민으로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서와 관련이 있다. 일제의 일..

역사이야기 2023.03.01

반도와 열도, 카라와 야마토

韓을 일본어에서 카라라고 읽는 바, 일본서기에 신라에서 얻은 자식을 韓子라고 쓰고 카라라고 읽는 다고 나온다. 가라 韓은 加羅/伽羅/迦羅와 같은 의미이다. 왜국에 살던 이들이 한반도에 사는 곳을 카라, 가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부산과 가까운 규슈에는 오죽하면 ’카라쿠니다케(韓國岳)는 산이 있겠는가. 이 산 정상은 구시호루라고 하는데, 이 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구지봉 전설과 비슷하다. ‘카라(韓)’를 의도적으로 ‘카라(唐)’로 대체 하려는 시도는 한반도에서 대거 이주한 인상을 지우려고 했던 행태와 유사하다. 이는 마치 도래인(渡來인)이란 중립적인 표현을 써서 중국에서 많이 이주한 것처럼 꾸미려는 노력과 상통한다. 최근에도 ‘카라쿠니다케(韓國岳)’를 카라쿠니다케(辛國岳)‘나 ’카라쿠니다케(空國岳)‘로 바꾸..

역사이야기 2023.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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