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고구려의 1차 남진과 왜국의 백제 속령화

켓세라세라 2023. 3. 1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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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과 대방의 멸망 이후 4세기 근초고왕 시기에서 백제와 왜의 첫 교섭, 그리고 7세기 663년 백촌강 전투까지 이 땅 한반도와 열도 사이는 뜨거웠다. 그 사이에 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사이의 이합집산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한국 교과서에서 정답처럼 외우는 각 나라의 전성기는, 백제는 4세기, 5세기는 고구려, 6세기는 신라가 전성기였다. 일단 4세기를 관통하는 야마토의 왕은 인덕천황인데 생몰연대로 따지면 257년생, 399년 졸이니까. 142세를 살았다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쨌든 오사카시에 있는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 무덤의 주인공으로서 오사카 교토 지역의 경제개발, 농지확보등의 업적이 있는 인물이다.

오사카 인덕천황릉

알다시피 근초고왕은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왕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고구려의 절치부심,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드디어 광개토대왕때 화려한 복수를 실시한다. 광개토대왕 영략 5, 백제를 공격한다. 이른바 일본의 역사 왜곡과 관련된 신미년 기사이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 [고구려에] 조공(朝貢)하였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391)에 건너와 백잔을 공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이에 [영락(永樂)] 6(396) 병신(丙申)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광개토왕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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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하는 엉터리 해석을 하면서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문장의 주어가 왜일 수 없으니, “그런데 왜를 신묘년 이래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격파했다. 백잔은 [왜와 연결해] 신라를 [침략해] 신민으로 삼았기에”,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라고 해석하는 서강대 정두희 교수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보인다.

광개토대왕비, 출처 : 중앙일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왜국과 긴밀한 교류를 하는 백제가 눈에 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백제정벌로 아신왕은 좌절을 하고, 고구려 대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를 하고 항복한다. 그리고 영락9년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나라와 화친하여 내통하고, 영락10년에 벌어졌던 병자년 전투에서 5만 군대를 파병해 왜에 포위되어 있던 신라를 구원한다. 신라를 침공한 왜는 기본적으로 가야와 친근하다. 가야 왜 백제 라인은 광개토 대왕의 남정으로 한반도에서 그 힘을 크게 잃는다. 그리고 고구려 군대의 눈부신 활약에 가야 소국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신라에 의해 관리 받는 처지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이미 일찍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가야계는 한반도의 가야와 열도의 가야로 나뉘어져 서서히 힘을 잃게 되고, 그 이후 가야의 운명은 알다시피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본 열도에서 가야는 서서히 백제계에게 그 힘을 빼앗긴다.

불우한 아신왕이 죽자 백제에서 내란이 발생한다. 아신왕 막내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태자로 왜에 가 있던 전지는 이 때에 왜인 100명의 호위를 받고 해씨 가문 해충 도움으로 설례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른다. 삼국사기 기록만 보더라도 전지왕대에는 왜국에서 夜明珠를 보내왔고, 백제에서는 白綿 10필을 보내는 등 그 백제 왜의 관계는 갈수록 튼튼해 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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