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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Offret, The Sacrifice, 1986 ) | 스웨덴 , 영국 , 프랑스 |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켓세라세라 2024. 9. 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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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영화 ‘희생’ 주제는 제목이 말해준다. 명료하다. ‘희생’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감독은 생각한다. 냉전 시기, 소련에서 서구로 망명한 타르코프스키 감독, 죽음을 앞둔 암에 걸린 육신, 기독교로 회귀가 읽힌다.

출처 : 다음 영화

희생양은 고대 이스라엘 유대에서, 속죄일(贖罪日)에 많은 사람의 죄를 씌워 황야로 내쫓던 양을 의미한다. 인류의 희생양은 메시아, 예수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은 자식 이삭을 번제에 바친다. 이른 바 인신공양이다. 신(GOD)이 제물을 태운 냄새를 왜 좋아하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사람대신 양이나 소, 돼지 등이 대신 제사에 사용된다.
자기 희생을 통한 구원자의 종결, 이 죄 많은 세상에 속죄양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서사의 완성은 메시아 예수이다.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은 꽤나 오래 된 것 같다. 고대인과 중세인, 근대인, 우리 모두의 해방, 세상의 구원, 압제를 끊고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꿈. 워낙 부조리와 고통, 죄가 판치기 때문일까.
마르크스에게 구원자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었고, 헤겔은 시대정신과 영웅을 내세웠다. 니체가 ‘초인’을 기다렸지만, 그 초인을 흉내 내는 히틀러와 같은 온갖 살인자들만 양산 되었다. ‘이 세상을 구원해 줄자 그 어디에 있느냐’, ‘하나가 천만이 될 때, 압제의 사슬 끊으리’(북한 선전 가요가사 이다) 주체사상에서 한 명인 수령과 다수인 인민대중이 구원자일까? 묘한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합이다. 그들이 연출해 내는 영웅과 대중의 극장 국가, 희비극이 펼쳐지는 쇼 일뿐, 진정한 해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요와 공급 곡선이야 말로, 개인 욕망의 조절을 나타내는 증표이면서. 시장, 마켓에 대한 숭배는 저절로 세상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게끔 이끄는 선지자의 약속이었다. 아담스미스여 영원하라!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 동생인 김흠순 장군(배우 신정근)은 아들 ‘반굴’을 자살특공대로 내 몰며서 “내도 죽고 싶다, 죽고 싶어 미치겠다”라고 한다. 마치 영화 ‘희생’의 감독 또한 ‘나도 희생하고 싶다. 희생하고 싶어 미치겠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어떤 진지함도 요구되지 않는 시대에 ‘자본’은 반성을 할지언정 결코 자기 희생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필연적으로 많은 이들이 좁은 곳에 몰려 살면서 발생한 문제, 궁극의 공동체는 리바이어던 괴물 ‘국가’ 였다. 인간이 만든 공동체 유지를 위해 고안된 여러 희생제의들, 마녀, 천민, 노예, 여성, 성적 소수자, 이방인들에 대한 폭력은 계속된다. 카미카제 특공대나 전쟁터에서 무의미한 돌격의 임무를 받은 병사들. 모두가 국가 공동체의 희생양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이제 희생의 주체, 대상, 방향은 영화를 보는 고급 취향의 관객 몫이 되었다. 가수 조용필은 ‘바람의 노래’에서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 하겠네”라고 노래한다.
어차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사랑, 이타주의, 희생도 불가능하다. 세상의 구원? 나의 해방과 너의 해방, 우리 모두의 해방의 연결 고리는 이제 끊어졌다.
이제 최첨단 과학기술의 선구자들,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젠승황, 엘론 머스크 등이 이끄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군단, 인공지능이 그 우리의 해방일지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자 한다.
인공 지능이 과연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판도라가 열어 제친, 세상의 죄와 악 모두를 다시 상자 안에 불러 모아서, 그 상자 문을 닫고자 하는 것은 처음부터 ‘죽은 나무에 물주기’란 말인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이제 그 말씀은 SNS에서 무의미한 중얼거림과 소음으로 가득찬 가짜뉴스와 페이크 영상으로 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럼에도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까. 지금은 거의 아무도 쓰지 않는 ‘우리의 해방일지’, 누군가는 이어서 계속 써 나가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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