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콘크리트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2021

켓세라세라 2024. 1. 4. 10:42
반응형

아무리 봐도 특정 정당, 정치인에 대한 선택과 평가는 개인의 호불호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신념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겠다는 이는 좀 생각이 다를 것이다. 세상이 개판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 개판을 그만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의인(義人)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의인(擬人)의 등장은 필연이다. 이른바 개판 오분전도 아니고 개판 5분후이다. 견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그 개()가 아니다. 씨름 판에서 두 선수가 같이 넘어지면 서로 자기가 이겼다, 우기면서 시간이 지연된다. 그러면서 경기를 새로 하라고 하여 '()'이라고 한다. 하여간 개판() 이든 개판()이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면서 상대방을 괴물취급하는 이들이 이제는 일상화 되었다.

출처 : 다음영화

한국 정치가, 한국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최근 드라마나 영화는 제목만 봐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오징어게임, 지옥, 미끼 등등, 공포 호러 스릴러 다크 판타지이다. 유튜버들은 이것을 미스터리 서스펜스 범죄 느와르 장르 음모론으로 각색하는데 창의적이다. 유머와 위트는 없다.

괴물, 괴수 영화의 뻔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 각자의 편안한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하고 사회와 국가 시스템은 혼란에 빠진다. 누군가가 그들과 싸운다. 간난신고를 겪고서 괴물이 퇴치되면 세상은 다시 편안해진다. 그 나쁜 놈, 나쁜 것들만 사라지면 훨신 좋은 세상이 된다. 누군가가 그 일을 해 주면 좋겠고, 영웅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 정의봉을 드는 자신을 이미지화 하기도 한다. 가끔은 그렇다.

이병헌 극중 '영탁' 역, 출처 : 다음영화

그러나 지나온 역사가 증명하기를, 인간사에서 그 괴물을 퇴치하기로 작정한 이들이 사실 괴물이었다는, 또는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었다는 그 서사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니 이야기는 조금 꼬일 뿐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완성되어 간다. 이제 질문은 왜 괴물이 되었는가, 괴물과 싸우는 또 다른 괴물은 어떻게 결심하게 되었는가. 괴물끼리 싸우는 이 전쟁, 전투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콜로세움에 던져진 괴수끼리의 혈투를 보는 관람객들, 심판의 의무와 역할,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총기 소지와 사용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칼과 그 비슷한 흉기로 누군가를 죽이고, 죽인다고 겁박하고, 위해를 실제로 행한다. 이제 습격와 피습에 대해 일반인들은 항상 의식을 하고 대비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 괴물을 퇴치하고자 한 영웅이 스스로 괴물이 되고자 한 것일 까. 그들은 이제 정의는 잡혀졌노라고, 이 악의 근원에 대해 경고는 한 거 아니냐고 은밀히 아니 당당히 속삭이는 듯하다.

출처 : 다음영화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지옥의, 이 유토피아의 바탕에는 그렇게 행동하라고 만든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경제 구조, 사회구조등의 시스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되려 특정한 불손한 개인, 원래 정상이 아닌 이들, 원래 동료시민의 자격이 없는 이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정신으로 필사적이고 절박한 사람들이 무간 지옥에서 활약하는 괴물과 악마들로 그려진다.

고대나 중세의 전쟁, 전투시에 중요한 것은 피아 구분과 자기 증명이다. 나는 어느 집안의 누구 누구이다라고 서로 밝히고 결투에 들어간다. 너의 목을 베겠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공감은 없다라는 선언이다. 관계, 그 관계를 승패와 손익으로 아주 쉽게 치환해서 생각하는 이들, 그들은  무시받는 다는 느낌, 그 모멸감의 중간값과 디폴트 값은 높게 형성될 수 밖에 . 그 모멸감을 직접 행동으로??  또한 타인과의 공존 상생, 배려를 지키지 못하고 진정한 희생과 용기를 발휘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럼은 약해지기만 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둔감함, 역치는 되려 강해진다.   볼빨간 수치심이야 말로 우리가 괴물이 아니다라는 증거인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