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통합사회

통합사회 : 행복의 의미와 기준 3

켓세라세라 2024. 4. 2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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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통사1-02-01]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행복의 기준을 사례를 통해 비교하여 평가하고, 삶의 목적으로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한다. (교육부 사회교육과정 2022-33호)

근대사회 이전의 삶에서 ‘개인’으로 살았던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는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을 것이고, 주어진 자연환경, 사회환경에 맞추어 내려오는 종교, 전통과 관습, 거의 자동화된 강제 문화 알고리듬에 묻혀 사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식량이 부족한 시기를 넘어 추수할 때 까지 버틸 것인가. 가렴주구의 내부의 적과 외부의 침략자들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의 세계, 자연 또 다른 이름, 신의 섭리 하에 개인의 행복을 주장하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권리로서 행복의 추구, 행복을 보장받아야 할 마땅한 것으로서의 인식의 큰 변화는 구약성경 ‘욥’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삶에 주어진 수많은 제약과 구속들, 삶의 조건, 신이 만든 질서와 조화이든, 원래부터 호머사피엔스가 깨달은 숙명이든, 여러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씨족과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면서 왕과 귀족에서 시작한 성씨, 어느 가문출신의 누구인가가 세습화된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과 방법이었다. 당나라 군대와 싸우다 치욕적으로 패퇴한 김유신의 둘째아들, 원술랑에 대한 김유신과 모친의 차가운 반응은 가문의 영광, 명예,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근대로 접어들기 까지 씨족과 부족의 분화, 친족 가문의 형성, 지배귀족 계급의 행태에 평민과 노비 또한 어떻게든 사다리를 올라서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평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성씨 갖기와 조상의 위대함을 입증할 족보에 대한 집착은 커져 갖다.
동양적 사고, 인도가 동양일리는 없으나, 불교가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유불선이 한중일 삼국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유교의 세계관은 철저히 사회적이다. 그리고 관계지향이다. 원래 도덕과 윤리는 사회와 그 사회 내에 사는 이들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유교의 여러 덕목들 인의예지, 극기와 성실, 충과 효는 일정한 사회의 평화와 질서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 노동을 하면서 일평생을 마치는 현실에서 중장년 남성들의 사회에 대한 지배와 통제, 자신들만의 이익공동체 추구, 게임의 룰이나 리그, 즉 약속대련에 대한 설계였다.

공자   Confucius

공자 제자 중 한명이 농사 짓는 법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화를 내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질문 한 제자를 흉 본 사례는 유명하다. 양반 귀족, 선비, 사무라이, 그들의 관심은 국가 운영과 지역통치를 위한 엘리트 계층에 대한 교육에 있다. 그런 이들이 되는 것이 행복이었을 텐데, 이미 공자 사후 400년이 지난뒤에 사마천은 유자(儒者)들의 모순과 엉성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려 조선의 양반 선비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흡사하다.
지배계층으로의 편입에 대한 강렬한 소망, 한 중 일 삼국이 처한 모습은 다를지라도, 특히 과거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이 아예 불가능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고 나발이고 간에 사회 내에서 지위경쟁, 입시전쟁, 입신양명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수신과 제가가 치국과 평천하를 위한 준비운동이라면, 치국과 평천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심리, 수신과 제가가 애초에 불가능한 이들의 행복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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