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통사1-02-01]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행복의 기준을 사례를 통해 비교하여 평가하고, 삶의 목적으로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한다. (교육부 사회교육과정 2022-33호)
운 좋은 것, 행운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보편적이다. 복권당첨과 같은 경우 예기치 않은 행운이 다가올 때, 모든 사람들은 좋아한다. 시대 장소를 넘어 사람들이 야바위, 도박을 좋아하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를 떠난 호머 사피엔스, 밀림 숲과 해안가를 어슬렁 거리며 채집생활을 할 때, 운 좋게 꿀 통을 발견하거나, 맹수가 사냥하다 남긴 고기등을 발견했을 때, 남다른 행운에 즐거워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행복의 기준은 쾌락, 긍정적 마음을 뜻한다. 쾌와 락, 즐겁고, 편한 것, 좋은 것, 기쁜 것, 결혼식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던가. 때가 되면 성선택을 하고 사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생물학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진화과정에서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에 유익하고 번식확률을 높인다. 달달한 것을 먹으면 행복해지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다. 칼로리가 높은 단 것을 먹어야지 여분의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만과 당뇨와 같은 성인병 유발 걱정을 전근대 호머 사피엔스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항상 칼로리는 부족했었으니까.
기분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것이 설탕이든 마약성분이든 환각 성분이 든 약초나 버섯, 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니 삶의 목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나, 삶의 목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면 왠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정신적인 행복,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행복을 쾌락보다 중요시 여기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같은 의미라는 것에는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단기적 쾌락, 장기적 행복으로 구분하는데, 금욕을 통한 행복 주장이 아예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순간적인 잠깐의 기분 좋음, 장기적 불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신적 행복 추구이다. 쾌락주의자 에피큐리안에 대한 오해도 그렇다. 금욕을 강조한 기독교 세계에서 에피쿠르스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이 거셌다는 것도 재미있다. 사실 에피쿠르스의 쾌락, 행복은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마음의 안정, 정서적 평안을 의미했고 가족과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이야기와 정을 나누는 소박한 행복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행복에 대한 논의는 욕망에 대한 긍 부정적인 태도로 나뉘어진다. 욕망에 대한 부정의 대표적인 생각은 불교 철학이다. 해탈, 열반에 드는 것은 차원 높은 행복이다. 행복은 외부 객관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개인의 주관, 마음에서 찾는 것으로 연결된다. 정신 내면의 불안과 고통, 해방을 추구한 그리스 로마의 스토아 학파와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게르만 원정에 나선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무관심을 몸소 실천했다.
어쨌든 한 개인에게 인생은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의 기준과 의미를 계속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이 길이 하나일 리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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