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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문항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과연 불가능할까.

켓세라세라 2023. 10. 2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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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대체로 관용적이다. 그러나 제국의 질서 내에서만 그렇다. 제국 통치에 균열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에 대해 AD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대인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전부터 계속된 로마에 대한 저항은 135년을 끝으로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세계난민이 되었다. 학살과 노예화, 그 와중에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런 역사 이전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받는다. 기원전 6세기 정복자이자, 해방자인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 성경에는 고레스왕으로 불리었던 이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였다. 구약성경은 키루스 대왕을 찬미하는 이야기 일색이다.

키루스 대왕 무덤

 

십자군 전쟁이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프랑스계 기독교 국가들, 살라딘의 관용에 포위되어서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또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고, 다양한 민족, 부족은 공존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이룬 바탕에는 오스만 황제의 관용의 정책이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상이한 종교나 문화로 인한 갈등이 극대화 되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들 끼리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 한 만은 아니다. 어디 신앙의 자유뿐이랴, 관용은 자신의 신념이나 기준에 어긋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고의적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관용이 도덕적 덕목이 되려면 권력기반이 필요하다. 이때의 권력은 타인의 가치나 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금지할 수 있지만 용인하는 것, 그런 면에서 관용은 곧 권력행위이다.

또한 차별과 배제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개개인들을 억압 수단을 통해 불이익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억압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권력행위이다.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개개인들을 각종 사회적 수단을 통해 불이익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억압'이나 금지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권력 행위이다. 다만, 대체로 차별은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받기 힘들다는 점에서 흔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노비나 노예에 대한 사회경제적 억압을 생각해 보라.

집단과 집단 간에 그 힘의 겨루기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팔레스타인들의 피와 눈물의 댓가이다. 생존을 위해서 가자지구에 대한 철저한 봉쇄와 압박이 불가피하다고 하는데, 그저 힘의 남용일 뿐이다. 이제 그 댓가를 치루고 있다. 어차피 한 지역 내 수백만의 사람들을 말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서로가 공존하기를 바라는 이들의 염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은, 이미 패배했고, 지옥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평화를 위한 과감한 합의와 타협, 양보가 불가능 할까. 어느 집단이나 온건파, 강경파가 있는 법, 강경파와 강경파가 대결해 목소리를 각자 키울 때, 대화 소통은 단절된다. 전쟁 중에도 사신은 처형하지 않는다. 강한 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비겁한 것 만은 아니다. 숙일 때 숙이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주고 받는 가운데, 생존과 공존, 공영,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출처 : 위키백과

이스라엘 내 강경세력, 가자지구의 하마스, 또는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온건파, 세상은 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이도 저도 아닌 평화파들, UN이든 세계 강대국이든,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더 이상 팔레스타인 문제가 인류의 킬러 문항이 안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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