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님비에 물든 생활정치, 어려운 마을자치

켓세라세라 2022. 9. 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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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교 경전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개인과 가족 가문, 국가, 세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단계별로 수신에서 평천하로 연결된다. 그 반대 역순으로 평천하하고 치국한 다음, 제가 수신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제가와 치국 사이에 빠진 것이 있다. 제가의 가를 가문이라고 넓게 해석해도, 한 개인이 사는 마을공동체, 지역 공동체는 빠져 있다.

자치 중심의 지역 분권형태의 정치체제보다, 중앙집권화 된 농경 유교사회의 원리상 어쩔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기는 한데, 그렇다 해도, 다스리는 것에 자신과 연결된 상위 공동체 개념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데, 지역공동체가 빠진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마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다스림, 정치는 어떤 권력자에게 맏기지 않아도 자치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용돌이 한국정치에서 모든 인력과 자원이 서울로 집중화 된다고 해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어찌 정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물론 명령과 복종의 정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족국가 전 단계에서 인류는 족장, Big man, 추장은 있었지만 그렇게 위세가 있거나 권력이 그들에게 부여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반도 역사에서 통일신라 이후 호족의 영향력 하에 놓인 고려 전기와 중기 까지, 중앙정부의 힘은 미약했다. 왕조차도 향촌의 향리에게 무시당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무신정권 기간에 벌어진 광범위한 지방 반란, 계급 반란이면서도 지역반란의 성격을 띠었고, 최충헌은 반란을 진압하기 보다 회유하기 바빴다.

이후 조선시대 태종의 5가 작통법에 의한 중앙 통제가 강화되기는 했어도, 사림과 지방 양반이 주도하는 지방정치는 나름 잘 작동했던 것 같다.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반공독재의 반상회의 통제와 감시 시스템은 완성되었고, 이후 DJ의 노력에 의해 지방자치는 1991년 부활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제도면에서 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지만, 그래도 개인의 생활권역과 제도는 거리가 멀다. 아직도 규제와 돈줄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의 힘이 강한 현실임을 감안해도, 생활정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아파트 단지별로 마을이 형성되어 버리면, 관리사무소의 획일적인 행정처리 이외에 결정하거나 판단할 거리가 많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 지방정치, 생활정치는 죄다, 님비 지역이기주의 현안과 관련되어 있다. 무엇을 해달라기에는 정책역량과 정보의 부족, 인적 자원은 빈약하고, 무엇을 하겠다는 중앙정부 내지 지방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하기가 아주 쉬운 구조인 것이다.

힘의 공백 속에서 자치의 힘과 역량은 떨어지니, 말이 자치이지 이전투구의 장이 되기는 너무나도 쉽다. 한국 영화 ‘이장과 군수’는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덴마크의 ‘폴케뫼데', 정치학자들이 좋아하는 이상적인 지방자치, 민주주의 사례이다. 이를 모델링해서 한국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꽤 있었는데, 잘 되겠는가. 잘 될 일이 있겠는가.

 

덴마크 폴케뫼데


곰팡이는 음습한 곳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주민자치, 마을자치,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같은 허울 좋은 제도를 실질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정보를 독점하거나 숨기면서 자신의 못된 욕망실현을 하는 자들에 의해 생활의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하는 숙의 민주주의는 어렵기만 한다.

층간소음과 같은 이웃 간의 갈등 해결에도 무력한 마을 공동체의 정치, 국토교통부의 층간소음관리위원회 구성과 운영 지원정책이 효과를 볼지 지켜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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