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정말 가난한, 마음이 더 가난한 사회풍경

켓세라세라 2022. 9. 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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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세 모녀, 성북 네 모녀, 수원 세 모녀 사건. 어디 이뿐이랴.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절대적 빈곤의 아픔은 GDP 3만 5천달러의 시대를 무색하게 한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강남 구룡마을 사진이다.


다음은 2022 9월2일 국제신문 [이상이 칼럼]에서 제언한 ‘약자 복지와 보편적 복지’ 내용이다.

“상대빈곤·서민·중산층이 절대빈곤이나 경제적 절망 상태로 추락하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가 사각지대 없이 잘 작동하도록 ” “급격하게 경제적 위기에 처한 가구에 대해서는 대상자 발굴 시스템과 통·반장 중심의 주민 제보 체계를 강화” “긴급 지원·상담과 금융·개인회생·직업훈련·일자리 지원 등을 포함한 포괄적·전문적 대응 체계를 읍·면·동사무소 중심으로 시급하게 확립”

반론할 여지가 없다. 원론과 각론 흠잡을 데가 없는 제안이다.

대한민국의 자산과 소득의 위계구조는 뾰족한 피라미드 형이다. 중산층이 두터운 다이아몬드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사회 교과서 내용만은 아니다. 불평등이 심하지 않은 사회는 스트레스가 적다. 반면 뾰족한 피라미드형 사회에서 시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불만족과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그 접점에 국가 복지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5~6년 시간을 복기해보면, 분명히 경제는 성장했으나, 부의 격차는 더 커졌다. 앞으로 달려간 소득 상위군의 그룹에는 수출대기업과 관련 강소기업 종사자들, 플랫폼 기업, 게임과 같은 IT 기업, 전통적인 꿈의 직장, 공기업 연봉을 받는 직업군이 있었을 뿐, 나머지 국민들은 그다지 성장에 기여한 바도, 성장의 과실을 나누어 받지도 못했다.


그 벌어진 격차를 메 꾸었던 것은 바로 ‘기대감’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자신의 경제적 상황과 조건 보다 더 높은 삶의 수준을 누리려고 기대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현실에서 부채, 빚을 통해 더 좋은 아파트 거주, 고급승용차, 해외여행, 중산층의 삶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코스피 주가는 3000을 넘어 4000을 갈 것 같았고, 아파트는 더블, 따따블로 상승할 것 처럼만 보였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잡코인?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경제는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 기대감, 디플레이션 기대감처럼, 기대심리에 좌우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 상대적 빈곤층을 이루는 이들은 집단적으로 미래에 낙관적인 전망과 편향에 빠져 근거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 환상으로 마음과 정신은 몽롱한 상태로 취해 있었던 같다. 빚으로 생활수준을 앞으로 내달렸던 이들과 맞추려고 했고, 이 사실은 미래 소득을 현재로 당겨온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경제적 댓가, 기회비용을 치러야 하고, 다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황의 터널을 지나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경제상황이 되기 전까지, 생활수준과 소비는 바닥을 쳐야 한다.


따라서 “정부여, 우리를, 나를 도우라!” 1년 600조 예산을 두고 이제 보조금의, 보조금에 의한, 보조금을 위한 정치가 시작했다. 나의 밥그릇과 네 밥그릇을 비교하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티포텟 전략이 효율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모두가 배려 심 없는 도로 위 운전 습관에 ‘그래 그러면 나도 다른 운전자를 배려할 필요가 없어, 조그만한 실수나 작은 욕심을 차리려는 행위에, 크락숀을 누르고,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고, 창문을 내려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한다. 그리고 당연히 신고각이다.

얌체와 무임승차에 대한 강한 경고와 어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선의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운전을 하고 싶지 않는 운전자의 권리, 안전하게 평화롭게 운전할 사람들의 권리, 조그만한 실수를 용서받아야 할 권리까지 애써 무시하고, 모른체 한다, 사리분별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미 터널효과에 의해, 자기 눈 밖에 난 타인은 이제 타인이 아닌 적일 뿐인 것이다.



가난의 효과인가? 씁쓸하다. 이 효과가 앞으로 어디로, 어디까지 미칠지....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게 과연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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