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수능시험은 왜 어려운가

켓세라세라 2023. 12. 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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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킬러문항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레이스, 이 기차에 탑승하기 위한 탑승권은 쉽게 얻어질 수 없다. 온갖 꼼수와 묘수를 비롯해서, 온 집안의 경제력, 인맥, 사회자본, 문화자본이 총 동원된다. 이른바 명문대를 향한 전시체제이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서 SKY 캐슬이다. 입시생이 한 집에 있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금방 이해한다.

 

자식 입시 성공을 위해 성당, 교회, 절간의 새벽기도를 한다, 예수님 부처님에 의지하고, 영험한 예지력을 자랑하는 점쟁이들이 4호선을 탈지, 2호선을 탈지를 결정한다. 싸워서 이기라는, 사자우리, 이종격투기장에 몰아넣고, 죽기 살기로 이곳에서 살아남을 것을 강요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예전에 잊혀진 영화 제목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는 생존 규칙을 존중하는 사회구성원들, 구세대나 MZ세대나 별 차이 없다. 이 모든 경쟁 구조에 휘말리고, 휘말릴 예정이고, 이 구조를 벗어나려해도 다시 영향을 받는 애처로운, 유혈이 낭자한 콜로세움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경쟁의 공정성, 정당성을 논해 봐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항상 더 존중받는다. 불법적인 방법과 위법한 수단, 사실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처럼 분명한 불법은 아니더라도, 편법과 반칙이 일상화된 이런 경쟁이 없다.

시험은 변별이다. 옥석을 가린다고 한다. 소중한 옥과 평범한 돌, 엘리트는 원래 소수이고 그들이 또 엘리트를 선별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들러리나 버려지는 돌들이다. 시험이 쉬워서는 변별을 할 수 없다. 대다수 돌들,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살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할지 관심은 원래 없다. 비정한 게임 구조이다.

모 야당 정치인이 정당 내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뒤에서 벌떼 같이 공격하는 이들을 마치 학교 폭력 가담자에 비유했다. “학폭의 방관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더글로리가해자 박연진과 함께 피해자 문동은에게 학교폭력을 가했던 학폭 가담자인 것 같다는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또는 실력 껏, 능력 껏 쟁취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자신도 보호받지 못하는데 약자와 루저에 대한 배려와 예의 차릴 게 어디 있냐고, 원래 싸우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법이다. 문제 해결의 키는 누가 쥐고 있는가.

원래 원숭이와 유인원 기질을 이어 받은 호머 사피엔스는 누군가를 공격하면 할수록 황홀감을 느끼는 기괴한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 자신의 욕망 실현에 방해 되는 자, 자신의 불순한 의견 내지 신념, 사실 오인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는 자에 대한 공격은 옥석 가리기 경쟁에서 탈락한 평범한 돌들의 반격이다. 여기에 스마트 폰이라는 돌을 손에 쥔 것은 익명성을 빙자한 잠재된 공격성을 표출하기 좋은 미디어 환경이다.

비상이니까 혁신해야 한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또 혁신위원회를 꾸린다. 선거 때 마다 반복된 패턴이다. 이제 지겹다. 각 정당들의 본질적인 폐해를 뭉게는 선거 전략은 정권마다 반복된 입시개혁과 닮았다. 개혁, 변화, 혁신, 그 방향과 목적이 불분명한 짓들은 그냥 적자생존, 인정투쟁의 한 모습일 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문동은이든, 박연진이든 외로와서일까. 공적 삶이 별로인 이들을 지켜 보면서, 자신의 일상에서 그들의 구차함을 비웃고, 결국 자신의 사적인 삶의 비루함도 그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 아닌 타인과 사회에 그 악의 근원이 있음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인가. 교권침해가 심각해진 것은 허술한 공적 서비스, 보호받지 못한 자신들을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풀이일 뿐인가.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혁신과 변화의 아이콘처럼 이 지위경쟁의 수렁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이들의 아우성을 바꿀 것은 인구 구조의 변화일까.  인구 감소야 말로 축복 아닌가. 혁신과 변화의 시발점은 높은 인구압에서의 해방이다. 남한 면적만한 포루투갈은 인구 천만이다. 이 좁은 한반도에 7천만이 왠말이랴, 3천만으로 줄어 든다면,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이성과 토론, 합리에 근거한 공적 영역에서 의사결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도 수능시험은 어려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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