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통합사회

통합사회,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 민주주의 발전1

켓세라세라 2024. 9. 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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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통사1-02-02]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질 높은 정주 환경의 조성, 경제적 안정, 민주주의 발전 및 도덕적 실천의 필요성에 관해 탐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은 좋음(agathon)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좋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을 설명한다. 좋음은 수단과 방법이 목적으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다. 그 목적은 예술의 지향점, 관객과 청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를 주는 작품은 좋은 예술이고, 좋음을 지향하기 위한 악기연주, 노래, 연기등은 좋음을 지향하는 활동이다.

렘브란트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돈은 수단일 뿐이다. 돈의 목적은 무엇인가. 돈으로서 지혜와 편안함, 우애와 친절, 여유와 여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좋아하는 돈의 목적은 끝이 없다.  어떤 좋은 것들 중 끝이 있는, 그 자체 목적의 최 정점,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행복은 돈과 같은 것들, 온갖 수단과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충족된 상태를 뜻한다. 당연히 행복은 사람마다 주관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음으로서의 행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최적으로 발휘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 같은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함, 아레테(arete)라고 한다.
이러한 아레테, 훌륭함의 행복은 결코 개인적, 경험적 느낌이 아니다. 최고선이자 최고 목적, 이성적 기능을 완성한 상태내지 이성적 사고를 통한 어떤 지적 활동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지적활동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가는 중요하다. 여가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여가가 일보다 본질적인데 이는 여가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놀이, 유흥이 아니라 즉, 인생의 진정한 목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결국 여가를 잘 누리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7~8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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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자가 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보았지만, 경제활동으로 장사, 사업을 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즈니스 맨은 정치 활동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치 참여는 제한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시민들은 노예나 상인처럼 살면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삶은 천박하다.” 비슷하게 스승 플라톤은 그의 존경해 마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사람들이 돈벌이에 더욱 가치를 부여할수록 미덕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게 되어 있다.”는 말을 전한다.
아레테, 행복(eudaimonia), 최고선, 최고 목적을 지향해야 하는 이들은 이른바 ‘동료시민’ 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갖는 문제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한데, 결국 동료 시민이란 노동, 일에서 해방된 남성, 자유시민, 자산가를 뜻한다. 애초에 여성, 이방인, 외국인, 장사꾼, 노예나 빈민들은 정치 공동체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거나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충분한 여가를 보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야 말로 육체 노동에서 해방되어 공동체의 진로, 목표를 숙의 숙고할 자격이 주어졌다. 특히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미덕은 사회 복지에 이바지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아테네와 같이 상시적으로 전쟁의 위험을 감수했던 사회에서 시민의 의무는 전투력을 공동체에 제공하는 것을 의미했다.
남성 중장보병들의 민주주의, 아테네 시민들 경우 평균 거느리는 노예는 수 십명에 이르고, 갖고 있는 토지, 부동산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땅과 노예를 소유한 남성 지주계급의 정치현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바람직한 공동체, 폴리스란, 동료 시민 상호간의 우애가 지켜지며, 공정한 서로간의 관계가 유지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니 ‘나의 해방일지’가 개인의 행복을 의미한다면, 모두 내지 사회공동체의 ‘우리의 해방일지’를 써가는 것은 처음부터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행복, 그것도 민주주의 발전과 행복과의 관계,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시민적 우애가 지켜지는 사회가 바람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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