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동료시민, 시민적 예의는 없다

켓세라세라 2024. 3. 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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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청산’의 시간이 돌아왔다. 아니 그 시간이 돌아 돌아 올리는 없는 것이고, 정치의 본령이 원래 심판과 청산이다. 그런데 심판과 청산의 주체는 시시각각 달라져 온 것이 역사다. 손 좀 봐줘야겠다는 힘 있는 개인이나 세력이 있다면, 손 봐줄 대상인 피해자들도 항상 맞은 편에 서있어 왔다. 그 피해자들도 이제 순순히 호락호락 하지 않는다. 대중이나 군중, 정당원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 다수의 표 장악을 위한 경쟁과 선동은 강화되었다.

사람 이름을 정당의 이름으로 사용하든 안 사용하든, 원래 박정희 당이고 김대중 당이고 김영삼 당, 김종필 당이었다. 친박연대? 조국혁신당? 어차피 윤석렬 한동훈 당이고, 이재명 당이다. 사인화(私人化)된 정당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기우일 뿐이다. 가치와 신념은 원래 상대적인데다, 그것이 나름 있다고 우기는 용기 있는 이들이 특정인을 지지하겠다는데, 더 할 말이 무엇이랴.
원래 광인과 바보나 욕심쟁이, 기회주의자들, 감정 독재자들, 적대세력 배제에 쾌감을 느끼는 이들, 강성 광적 팬덤들도 각각 사회적 역할과 임무가 있는 법이다. 뭐 이들이 설친다고 해서 나라가 망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이들이 전면에 나서는 데 한편에서는 없는 ‘동료 시민’ 운운하고 있다. 없기는 시민적 예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세련된 정치용어이자, 선동일 뿐이다. 이미 국민의 마음에는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져 있는 강(江)이 흐른다. 그저 더 각박한 사회가 되는 것이 편할 리는 없으나, 오히려 그 강이 고마울 수도 있겠다. 체념과 회의의 방향으로 배를 저어나가다 보면, 안 보이는 것도 보이고, 더 재미난 일로 구경할 수도 있으니까.

정치가 괴기해 지는 것만큼 계층, 이념, 지역, 세대, 문화 갈등이 누적되고 확대되어 왔다. 그 결과, 인간성은 피폐해지고, 사회적 예의와 도덕은 쇠퇴한다. 정치테러는 더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고, 묻지마 폭력과 같은 생활 폭력, 정신 이상자의 난동은 더 뉴스에 오를 것이다. 공무원과 선생님들을 죽게 만드는 악성 민원은 정도가 더 심해질까? 제도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겠지만, 쌓인 원한과 분노의 방향은 과연 어디로 또 향할까. 동료시민들의 삶에는 사회적 협동과 평화가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정치의 결과이고, 또 정치는 시민적 삶의 결과이다.
그래도 생각이 달라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정치적으로 적대한다고 해서 귀향을 보내거나 목을 치거나, 더 나아가 멸문지화를 삼는 등 야만의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근대란 시대의 선물이다. 그러니 폭력은 근본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상태에서 민주와 자유의 이름으로 갈등은 영원히 봉합되지 않는다. 역사란 거대한 경로의존성의 한 가운데에 떠다니는 개인 활동의 부유물일 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밀렸거나, 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울분과 슬픔으로 재기를 항상 노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정조는 독살되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 노론에 패배한 남인의 진실이다.

갈등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순기능으로서의 정치보다, 분열을 조장하고 배제를 강제하는 역기능으로서의 정치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 지쳐 한시적이나마 합의로 나아갈 수도 있겠고, 어차피 논리적 감성적 접근으로 중도층을 설득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위임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면 상처가 치유가 되고 사람들은 더 성숙해 질까. 역시 회의적이다. 사람은 그냥 잘 변하지 않는다. 원래 제 정신이 아닌 이들이 똑똑해 지거나 현명해 질 리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들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 난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에서 정작 누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고 있는가. 냉정하게 따져 보는 것 또한 필요하다 싶기도 하다. 다들 그들의 뻔뻔함에 놀랄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여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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