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2022

켓세라세라 2023. 7. 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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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잘 섬 island는 사고실험의 장소로 이용된다. 사회계약이 성립하고, 위계질서가 자리잡는 과정을 관찰하기 좋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15소년 표류기는 난파한 청소년들의 섬생활을 낭만적인 모험활극으로 그려내나, ‘파리대왕은 살인을 자연스럽게 저지르는 소년들로 인간 본성의 어두움을 묘사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사회공학의 실험으로 최고 엘리트 3만명을 섬으로 보낸 내용이 잠깐 등장한다. 3만명, 어떻게 되었냐고? 자기들 끼리 지위경쟁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이다 독재 체제를 만들어 힘들어하다, 결국 실험자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 출처 : 다음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다양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경제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한 이들이 누리는 부()는 정당한가? 가장 하층에 있는 이들이 같은 공간에 있으며 보이는 심리는 어떠한가? 자본주의가 새로운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는 근본 기제는 무엇인가? 갇힌 무인도에서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보다 더 불평등해지는 게 과연 문제가 되는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 기생충이 누가 과연 기생충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한 반면, 풍자와 예상되는 반전으로 경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마르크스보다는 헤겔적이다. 영원한 인정투쟁? 그 결과로서 현재의 불평등 질서, 그리고 불평등을 개선하거나 개혁하더라도, 또 다른 미래의 불평등은 계속된다는, 우리가 평등하다는 것은 벌거벗은 날 것의 인간이라는 것,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 먹는 것 하나에 매춘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세계 최고 부자들을 비꼬거나, 비웃거나, 놀림감으로 보여주는 것이 통쾌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들도 우리와 같은 허당이거나, 인간적이어서 슬프다.

영국의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면서도 세계혁명,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부르짖은 마르크스, 권력투쟁의 화신이었던 레닌, 어찌 보면 낡은 악은 낡은 악대로, 새로운 악은 새로운 악으로 작용한다는 법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슬프다. 중국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국가 체제는 일당독재인 바, 독재의 그늘에는 항상 봉건 영주들이 누리는 특권을 누리는 당원과 사업가들만이 득세한다. 또한 정당은 민주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내부 민주주의란 결국 허상에 불과하고 반드시 소수 독재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독일 사회주의자 미헬스의 설명이 와 닿 기 때문에 더 슬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정당민주주의에서 주인은 일반당원이다. 라는 것은 허황된 구호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어 더 슬프다.

우디 헤럴슨, 영화 슬픔의 삼각형, 출처 : 다음영화

무기력하고 자기연민과 번민에 빠져 있는 유람선의 선장은 칵테일 좌파의 표상이다.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역의 우디 헤럴슨, 그 망가진 모습이 지금 서구 좌파들의 모습인 것처럼 그려진다. 비뚤어진 부자들을 혐오할 수도 있고, 조롱하거나 풍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고 이제 어떤 대안도 없고 모든 노력을 의 미없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실망을 더 키우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도 같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란 것이 있기나 할까? 이념도 빛을 잃었고, 자본주의 성장에 뒤쳐진 국가와 수많은 빈민들, 자본주의의 찬란한 경제적 성과 뒤에 피라미드 하층부를 이루는 대부분의 패배자들. 프레카리아트, 단순 노동력 제공자들. 이민자들.

그런데 누가 선장이냐고? ‘배에서는 청소부, 여기에서는 선장’ ‘페미니스트는 개뿔'.’  ‘인덴볼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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