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세 가지 터널 효과

켓세라세라 2023. 7. 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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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안 차선은 두 개이지만 일방통행이다. 한꺼번에 차가 몰려 정체가 심한 상황에서 한 차선의 차들이 움직이면 그 옆 차선의 운전자는 이제 자신의 차선도 곧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자기 차선은 거의 그대로 거북이 움직임을 보이고, 옆 차선은 쑥쑥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짜증과 불만은 교통경찰로 향하기 마련이다. 교통경찰의 통제를 우습게 생각해 많은 운전자들이 법규 위반을 하게 되면 터널 안은 더욱 혼잡해지고, 정체는 더욱 심해진다.

 

 

분배를 무시한 채 성장만 계속 추구하면 결국 효율성이 떨어져 성장에 저해가 됨을 비유 한 이른바 허쉬만의 터널효과이다. 경제성장 초기에 국민들은 성장에 필이 꽂힌다. 어느 정도 불평등도 감수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분배는 없다. 시간이 지나 성장에 따른 과실, 분배에 관심은 더 커지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어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다. 한 차선은 5만달러 소득군이고 다른 한 차선은 1만달러 차선이다. 누군가에게는 살 만하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이고, 누군가에게는 헬조선이다. 불평등은 적개심과 분노, 불신과 경쟁심의 기반으로 작용한다.

일종의 공유지의 비극하고 비슷하다. 죄수의 딜레마 모형이다. 협력한 것에 대한 배신, 그리고 공동의 이익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시도는 위법과 탈법행위에 대한 유혹은 커져 버린다. 피프티피프티 사태, 전말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 게임에 참여한 주체들이 다 같이 공망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지금 당장 분배받지 못한 화남, 장기 성장을 지금 당장 당겨서 이익을 봐야 한다는 심보, 분배에 대한 조급한 기대는 선의에 의한 상호 협력을 와해 시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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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터널효과는 가난한 사람들, 1만달러 차선에 위치한 이들이나 더 많은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긴 터널 안에 들어가면 주변의 모든 사물은 깜깜하게 보이지 않게 되고 멀리서 보이는 터널 출구만 보인다. 가난과 빈곤은 단기적인 희생과 손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장기적인 미래의 기회나 위험에 대한 신호는 가볍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OK 목장과 같은 결투를 하듯이 관공서에는 온갖 이익이 상충될 수밖에 없는 민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또는 새치기 하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다. 물론 사람은 어느 정도 터널 시야 효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경제 위기 상황 사람들을 더욱 자제력을 잃게 만들게 한다. 이러한 인지의 무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사실 저소득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산층, 상류층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다.

 

그래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긴긴 터널의 끝, 밝은 빛이 보이는 곳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간다는 생각, 언젠가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끔 하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교통질서를 어지럽히며, 차선을 위반하고, 주위 운전자를 위협하며, 뇌물을 써서 일방적으로 자신이 먼저 가겠다고 하는 이들을 엄격히 단속하는 것도 필요하다. 교통 경찰의 역할이다. 정부가 할 일이다. 국가 공동체의 이익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 일치 하지 않을 때 카르텔이라고 일방적으로 낙인 찍는 것도 필요하기는 하다. 터널 안에 이 모든 불만은 교통경찰의 잘못이라고 항의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정체되어 터널 안에 갇혀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국민은 기다릴 용의가 있을까. 터널 끝에 불빛만 보이면 말이다. 그러나 약속도 없고, 빅피쳐도 없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 경제학에서 풀지 못하는 킬러 문항이다. 대한민국은 독일 프랑스도 아니고, 노르웨이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니까. 다 같이 더불어 잘사는 게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겠다. 다만, 일상에서 묵묵히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터널 끝 빛을 보여 줄 수 있는 국가와 사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이것 또한 저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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