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합, 단결, 협동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부일처제 가족제도는 카르텔의 결과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탈, 실질적인 일부다처제가 목격된다. 일부다처제가 여성에게 꼭 불리한 것 만이 아니다. 더 능력있고 수입이 높을 뿐 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더 자상한 남성을 고를 자유만 있다면 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실제로 불법화 되었더라도 음밀하게 첩으로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이 있다. 중국에서 번성한 얼나이가 그렇다.
그러면 일부일처제가 문명화된 사회에서 일반화된 것은 왜 일까. 이른바 카르텔, 공모 이론이다. XY들은 여성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여성의 이익을 제한하고자 서로 협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힘세고 강한 이들이 여성을 독차지 하게 되면 발생하는 집단내 불안, 갈등,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이해가 된다. 힘없고 약한, 재산과 소득이 낮은 젊은 남성들은 사회 불만세력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남자들끼리 서로 결혼이라는 계약, 거래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구애와 사랑이란 행위로, 로맨틱한 매력으로만 경쟁을 제한한다. 더구나 일부일처제가 갖는 장점, 출산과 육아, 식량 확보에 훨씬 유리하다. 인류는 원래부터 남성과 여성의 협력에 의해 진화해온 존재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 주식시장에서 공매도 칠 때 암묵적인 카르텔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카르텔은 모든 카르텔이 그렇듯이, 불법과 편법, 배신이 난무한다. 약속을 기꺼이 어기는 또는 다른 카르텔에 의해 그들의 무한한 욕망은 제약을 받는다.
원래 카르텔이란 용어는 가격 카르텔을 의미했다. 공급자, 생산자가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경쟁을 하지만, 은밀히 담합을 해서, 소비자나 국민, 고객의 이익에 반하는 가격을 올리고자 한다. 왜들 안그러겠는가, 라면가격, 빵가격, 과자 가격, 휘발유 가격, 일상생황에서 카르텔로 의심되는 것이 한 두가지인가. 그러나 그렇게 고점에서 형성된 가격은 붕괴되기 마련인데, 시장 자체적으로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산량을 늘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업자를 속이는 일이 발생한다. 마치 일부일처제를 어기는 부유한 남성들이 젊은 첩을 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또는 더 강력한 카르텔에 의해 작은 카르텔은 항상 견제 받고 그 이익을 작게 추구할 것을 강요받는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 자신들끼리 카르텔을 형성해도, 뻔히 그 영향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 하기사 국가 야 말로 가장 강력한 카르텔 아닌가. 카르텔, 트러스트, 콘체른으로 향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국가의 시장개입, 독점에 대한 국가의 견제로 자본주의는 파국에 이르지 않았다.
국가의 형성,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발전은 지배계급의 출현과 그 공고함의 과정이었다. 양반귀족 계급의 카르텔 압제에 신음하던 한반도 아니었던가. 그리고 또 붕괴되고 카르텔 끼리의 무한경쟁을 거치고. 역사의 순환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란 카르텔에 대항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공산당원들끼리의 카르텔 국가 형성, 특권층은 항상 새롭게 형성되기 마련인가보다.
카르텔이란 단어를 유난히 좋아하는 대통령이다., “고위 공무원으로서 약탈적인 이권 카르텔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맞서 싸워 달라”“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편(카르텔)이란 말인가”“부정과 부패의 이권 카르텔은 반드시 부수어야 한다”라는 발언들, 자신도 특정 카르텔에 의해, 즉 헌법과 법률에 부여된 기소독점주의, 검사동일체 원칙등의 검사 카르텔에 일원으로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또는 대한민국 강고한 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지지 받고 보호받음에도 부패 카르텔은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렇다. 사회 디폴트 값으로서 정한 카르텔, 헌법이 부여된 강력한 카르텔 집단에 의해 우리는 관리된다.
그 디폴트 값 앞에서 장삼이사들은 이리저리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카르텔을 맺고 나름 집단의 이익에 숨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전체 공동체의 이익은 제껴 두고서 말이다. 손실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를 추구하는 지대 추구행위가 전 사회를 휩쓰는 것, 더 심각해지면 마피아와 조폭들의 카르텔 까지 난무할 기세이다. 그러니 불법 위법, 오 만용이 난무하는 해자 건설에 공력을 다하는 이들을 견제고 부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국가 경쟁력이 달린 문제이다. 어찌 교육부 카르텔, 사교육카르텔, 노동조합 카르텔만이 문제겠는가.
카르텔의 원래 어원은 약속의 징표, 서약서라고 하는데, 자신을 둘러싼 거대 기득권 카르텔에 애써 눈감는 대통령처럼 보이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한국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가지 터널 효과 (5) | 2023.07.08 |
---|---|
선량하고 성실한 채무자의 멘탈 (11) | 2023.07.05 |
신주단지, 공교육 정상화 (8) | 2023.06.28 |
쏠림과 취함, 절제와 중용 (10) | 2023.06.27 |
사교육비 114만원, 48만원의 차이 (15) | 2023.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