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통합사회

행복의 의미와 기준9

켓세라세라 2024. 5. 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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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통사1-02-01]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행복의 기준을 사례를 통해 비교하여 평가하고, 삶의 목적으로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한다. (교육부 사회교육과정 2022-33호)

전생의 가 현재의 로 이어지고, 죽음 이후의 환생으로 다시 연결된다는 생각, 처음 윤회를 생각해 낸 사람들은 아리안 계 인도인들인 것 같다. 처음 아이디어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었고, 그 세계로 가는 것은 개인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조차도 영혼의 불멸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독배를 마실 수 있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은 죽음에 대한 1차적인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에피쿠르스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끊는 데서 행복의 시작을 찾은 이들도 있지만, 신이 없다는 것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신화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킬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은 그만큼 떨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업보와 윤회의 사상은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중국에서 한반도로 일본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자신의 업(카르마)에 의해 현생의 계급이 결정된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지배계급에게 이로웠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영속화, 정당화하기 좋은데다가, 내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설 것을 피지배계급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배계급이라 하더라도 인생의 고통은 왜 없었겠는가. 더구나 덕을 쌓고 선을 행해야지, 윤회를 끊어내는 해탈의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하니, 자비로운 지배자로서 의무가 주어진 셈이기도 했다. 인과응보와 업보라는 엉성한 논리 틀이 매력적인 것은 피지배층에게도 이번 생이 망했다는 것에 대한 친절한 이유 설명이 될뿐더러, 좀 더 노력하면 다음 생에 지배계급으로의 계층상승을 기획해 볼 수 있으니, 온갖 노동과 전쟁으로 고된 삶에 그럭저럭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열반 너바나 Nirvana 해탈은 지금 현세에서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해탈에 이르는 길은 욕망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흡사 에피쿠르스의 생각과 유사하다. 먹는 것, 입는 것, 과시하는 것, 여행, 예술 활동, 사랑, 운동, 도박, 게임, 마약 등등 도파민을 높여 기분 좋게 하는 활동은 많다. 욕망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성취, 성과에서 오는 행복, 인정받는 행복 등등. 문제는 행복한 정도가 높아진다고 계속 행복, 기쁨이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증가의 폭이 줄어들고 심지어는 어느 지점 이상에서는 전혀 증가하지 않는다.

또한 고통이 크면 쾌락도 커진다는 것을 몸과 마음이 알아챈다. 그러니 고통의 강도를 높일 수밖에. 쾌락의 금단 효과도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중독의 악순환으로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성취와 성과, 성공에서 오는 행복 기쁨 또한 쟁취한 자들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 경쟁에서 작은 성과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질투심, 르상티망은 아수라도(阿修羅道)를 스스로 만들어 자신을 가두게 되기까지 한다.

동전의 양면, 행복 쾌락과 악순환으로 이루어진 인간세계, 부처님은  이 세상의 본질을 고통으로 보았고,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욕망을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그 행복, 뭔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당장의 쾌락을 선택할 것인가, 나중의 고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현재의 고통을 선택할 것인가. 나중의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이 모든 딜레마로부터의 해방.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이 욕망의 제거가 제대로 될 것인가의 현실적인 문제로 남는다. 여전히, 앞으로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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