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이데올로기와 인생1

켓세라세라 2023. 2. 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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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있었던 서사들, 각종 수기와 소설로 남겨져 있다. 최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구례 출신 빨치산이다. 한국에서는 금기어이다. 자랑할 것도 없는 불순한 정통 좌빨 공산주의자이다. 이들과 같은 이들이 문학작품 속에는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최인훈 선생의 ‘광장’에서 이명준,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에서 김범우, 염상진, 이문열 작가의 ‘영웅시대’에서 이동영,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에서 박태영 같은 이들이다.

출처 : 교보문고

흥미롭게도 1995년인가, 엄청나게 비가 많이 올 여름이었다. 비가 너무 내려 도로가 끊기고 전기가 나간 강원도 시골 초등학교 관사에 갇혀, 할 일은 밥해먹고 담배피우는 것밖에 없던 시간에, 작고하신 어머니는 그 긴긴 밤을 자신의 집안, 특히 큰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두가 쉬쉬하며 금지된 이야기를.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약방을 운영했다. 비교적 살림은 넉넉했는지, 부인 셋을 차례로 두었다. 첫째 부인은 큰 외삼촌을 낳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두 번째 부인을 곧 얻었고 아들 셋을 얻었다. 그런데 이분도 곧 돌아가셨고, 셋째 부인에서 딸 넷을 내리 나았다. 우리 엄마는 각각 배다른 8남매 형제 중 막내 딸이다. 가장 큰 오빠와 나이차이가 한 30년 쯤 된다. 첫 조카가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았으니까.

영화 모던보이, 출처 : 다음영화

어쨌든 큰 외삼촌은 일제시대 모던 보이였나보다. 일본으로 유학도 갔다 왔다고 하니까. 인텔리겐챠였을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가 정해 준 첫째 부인을 뒤로하고 주로 평양에서 기생들과 놀아나는 판에, 첫째 부인은 장 조카를 낳고 난 다음 서방 기다리다 지쳐 동네에 온 방물장수와 눈 맞아서 도망갔다고 한다.
두 번째 부인은 첫째 부인이 도망간 815 해방 즈음에 딸이 이미 둘 달린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하했을 때 안동지역에서 인민위원장을 했는데, 곧 전세는 역전해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월북을 하지...어쨌든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밑에 둘째 셋째 남동생이 모두 경찰이라서 사형은 면했다고 한다.

영화 모던보이, 출처 :다음영화

그동안 외할아버지는 큰 아들 사형당할 까봐, 온갖 연줄을 찾아 뇌물을 먹이고 구명하러 다니느라 팍싹 늙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도소에 수감된 외삼촌을 면회하러 친한 친구가 들락 거렸는데, 남편 면회 온 둘째 부인과 그만 눈이 맞았단다. 그래서 그 둘 연놈은 도망가고 자신의 씨가 아닌 딸 둘을 외삼촌은 데리고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단다.
감옥에서 풀려나서 영월지역 산골에서 평생 경찰의 감시대상으로 농사짓고 살아 갈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점잖고 인물이 좋은 홀아비라서 다시 시골 처녀와 연이 닿아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다. 각각 배다르고 씨가 다른 7남매, 큰 외삼촌은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자상하게 모두를 잘 돌보고 길렀다고 한다. 인격자이다. 그리고 역시 사회주의자이다. 일주일에 한번 씩 감시하러 오는 형사들과 막걸리도 꼭 한잔 하면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그렇게 효자였다고 한다.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그래도 인텔리라고 글도 대신 써주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도 가르쳐 주는 분이었다고 한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가 2008년 돌아가신 뒤 빨치산이 아닌 누군가의 형, 동생, 이웃으로서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지 쭉 생각해왔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닌 휴머니스트였다"고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큰 외삼촌도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어떤 생각 이념을 가지고 살았는지 정확히 확인해 볼 도리는 없다. 그 당시 지식인으로 사회분위기-그 시대 웬만한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사회주의자였으니까-에 그냥 경도된 사람이었을까. 독립과 해방, 분단, 전쟁의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옳고 그름의 이데올로기로 사람을 편 가르고 서로 죽이는 것에 신물이 났을까. 이념과 신념, 무슨 사연으로 인민위원장 까지 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왜 월북하지 않았는지는 이해가 된다.
굴곡 많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누군가는 약삭빠르게 시대를 이용하거나, 변화에 올라탄다. 그 반대로 부나비처럼 시대와 맞서다 스러진 개인들 그리고 그들의 서사들, 그들이 맞서야 했던 시대의 무게, 민족과 계급, 독립과 분단, 통일의 문제, 다시 개인들의 삶의 질곡으로 작용한다.
어쨌든 한 개인은 숙명처럼 시대를 뛰어 넘을 수 없고, 삶과 유리된 이념은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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