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괴물의 탄생, 괴물의 정석

켓세라세라 2023. 1. 1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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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공포와 역겨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생명 창조는 이러했다. 작가 메리 셀리는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과학의 공포, 기술의 역겨움을 가져 올 것이라는 호러소설로 표현했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괴물들, 좀비, 악마, 흡혈귀, 늑대인간, 구미호, 외계생물등등을 보면 왜 두려움을 느낄까. 그냥 영상이고, 쇼일 뿐인데.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착각이다. 소설이나 연극,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일종의 믿는 척하는 놀이라는 그럴 듯한 설명을 하기도 한다. 꼬마아이들이 소꿉장난 할 때, 장난감에 흙을 퍼 담고 맛있게 먹는 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인데, 이른바 진짜 감정이 아니라 유사감정이다. 홉스는 국가를 레비아탄, 리바이어던 괴물로 생각했는데, 국가가 괴물인 것은 일리가 있다. 괴물은 힘이 세니까 잘 다루어야 한다. 한편에서 저 녀석은 괴물이야라는 말로 괴물은 불가사의한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도 비유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을 보고 놀란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악은 평범하고 진부하다. 따라서 모든 괴물의 탄생에는 사실 특별함 보다는 평범함과 익숙함이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부패한 시대와 사회, 지배층의 협잡과 착취, 권력 비리, 부적절한 상황은 참 익숙하다. 그런데 탄생한 괴물은 이질적이고 낯설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웬지 에일리언을 닮았다. 그래서 외로워 보인다. 애처로워 보인다. 왜 괴물을 동정해야 하냐고 한다면 그렇다. 이건 아니다. 괴물에게 연민을 느끼다니, 변태스러운 생각이다. 괴물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게임이든 영화든 현실이든.

대한민국에서 괴물이 탄생했다. 한강의 괴물이 아니라 대장동 저수지의 괴물이다. 혹은 괴물들이다. 괴물과 싸우면서 스스로 괴물과 닮아버리는 모순도 아니고, 그냥 썩은 내가 진동하는 전통적인 권력=돈이라는 공식 하에 로비=나와바리 연합이라는 협잡괴물이다. 인류 역사에서 꽤나 익숙한 괴물이다. 룸쌀롱에서 골프장에서 뿌려진 오까네. 법관, 검사, 기자, 조직 폭력배, 정치인들이 얽히고 섥혔다. 이들을 향해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뿌린 뇌물 액수 만큼이나, 철근 콘크리트조 도시 신전에 바쳐진 제물은 또 다른 괴물들을 낳는다.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머니투데이, 뉴스1 언론인들, 재판거래 의혹의 전현직 판사 검사들, 변호사, 정치인들... 이쯤 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온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대사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보통 일반인이 괴물이 될 일이 뭐가 있는가. 온갖 명문대 출신의 법조인이나 언론인, 정치인 정도가 돼야지 괴물이라도 되는 것이지. 조폭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좌우파 진보보수를 망라한다. 한숨 나온다. 아니다, 영화 보다 더 재미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처단자가 등장해야 할 시점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가족들이 나온다. 영화 에일리언에서도 주인공이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항상 결말은 그래야만 한다. 엘리트 층의 부정 부패 비리 괴물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 누가 에일리언을 처단할 것인가, 이 수고로움을 기꺼이 할 영웅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coming soon! 개봉박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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