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신

존심과 잔심, 살뜰한 마음 챙김

켓세라세라 2022. 12. 2. 16:05
반응형

이사를 하면서 검도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이별의 시간, 물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간 짧은 1~2년의 인연이었더라도, 대충 내가 정리해도 될 것을 지도하신 전 관장님이 각종 내 개인 호구를 알뜰하게 싸 주신다. 그 마음을 그 당시는 좀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이제 어느 정도 수련을 하다 보니, 아 그 마음이 잔심이구나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회자정리, 어찌 살벌하고 잔인한 전쟁터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심하지 않는 마음이 존심이나 잔심이겠는가

이른바 검도 대련에서 존심은 타격 후의 자세와 마음을 뜻한다. 의외로 검도는 쉽다. 존심을 취하지 않은, 중단 자세가 흐트러져 있는 상대는 그냥 들어가 치면 된다. 과감히 몸을 던지지 못하는 상대는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 의외로 직접 해보면 쉽다. 물론 기세도 약하고, 자세가 훈련되지 않은 하급자들의 경우다. 하급자일수록 눈감고 나 때려 주시오 하고 칼보다 몸이 앞으로 나오니까. 그만큼 존심을 제대로 빨리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심과 잔심에 대해서, 검도계에서 왈가왈부한다. 이론적으로 세밀하게 출처를 밝히며 잔심과 존심은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다를 논한다. 같으면 어떻고, 또 다르면 어떠한가. 그 구별함으로써 얻은 이득이 있으면 받아들이면 되고, 큰 차이가 없다면 그 또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존심과 잔심,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량과 저량, 스톡과 플로어로 이해하는게 맞는 것 같다. 일정시점을 기준으로 타격 후 보이는 중단세가 존심이라면, 일정기간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마음이 잔심인 것이다.

잔殘은 남아있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餘 남을 여와 다르다. 죽을 사歹변에 창戈 두 개가 놓여있다. 전쟁터에 남겨진 것이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와 꺾인 깃발과 부상병이 난무한다. 승리한 자 입장에서 그 뒷수습을 해야 한다. 또는 예기치 않는 기습에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 도망간 적을 추격할지 말아야 할지, 전장에서 물러날지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지 판단해야 한다. 정신과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황,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잔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광개토왕비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호칭했다.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에서 패했으니까. 백제 떨거지들, 뭐 이쯤의 의미겠다.

승부의 세계, 쇼부의 세계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패배자의 잔심이라면, 명예롭게 패배자를 수치스럽게 하는 세레모니를 하지 않은 덕목이 잔심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스포츠 세계에서 세레모니가 없는 운동이 ‘검도’이다. 이 말은 지금 다니고 있는 검도장 관장님의 말씀이다. 맞다. 어찌 내가 이겼다고 우쭐대고, 패자를 한번 더 욕보이겠는가. 또 졌다고 패배를 수용못하는 것도 찌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치욕스럽더라도 졌으면 당당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왜 졌는지 복기해보는 것이 성숙한 마음이다.

결국, 존심과 잔심, 성숙한 마음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배려와 양보로 표현되는 살뜰한 마음 챙김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트에서 가벼운 인사일 수도 있고, 스쳐 지나갈 타인에게도 존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잔심이다. 승자와 패자의 영원한 화합, 상생, 비록 어쩔 수 없이 경쟁하고 투쟁해야 하고 칼로 적을 벨 지라도, 인간이란 졌다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며 이겼다고 우월하거나 가치가 높다고 우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승복하지도 않을뿐더러, 명백히 대법원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도 끝내 반성없이 무죄라고 우기는 정치판의 범죄자나 패배자를 보았을 때.... 그리고 아직도 이런 정치인을 추종하는 자들....한국사회에 꽤 많다. 이런 경우 잔심이란 확인 사살일 뿐이다. 이른바 폐족으로 만들어야 한다. 잔인 殘忍해도 어쩔 수 없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