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가야의 흥망성쇠, 삼국통일의 의의와 한계

호요토호 2025. 3. 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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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가야를 한반도 독립된 국가로 다루지 않는다. 고구려 신라 백제처럼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가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남은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3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가야의 역사는 삼국의 유사(遺事)에 불과한가?

3세기에서 6세기 까지, 경상남도 낙동강 지역에서 일어난 정치 사회적 변동의 실체는 무엇일까. 읍차, 한기로 불렸던 지배자들. 고만 고만한 분지지역, 마한처럼 넒은 농지도 없는데다, 철광 개발과 제련, 수출을 업으로 살았던 이들의 몰락, 중국 한 군현에서 하사한 옷과 모자를 위세품으로 받고 좋아했다던 기록들, 심지어 모조품까지 사용했다는 이들.

가야 고분

6세기까지 왜는 철을 자체 제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김해에서 대마도로,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철의 해상교역 루트는 왜() 야마토 정권의 수립과 유지, 안정에 필수적이었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의하면 대방지역, 지금의 황해도에서 왜병은 고구려 군대에 의해 크게 대파 당한다. 고구려에게 망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철 거래처 회복을 위한 가야의 용병으로 참전한 왜군이 아니었을까. 초기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군도 안정적인 낙동강 해상 루트 확보차원에서 용병으로 고용한 가야의 외교 작품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광개토대왕의 5만 남정은 결국 김해가야의 실질적인 패망으로 이어진다.

5세기 선진 고구려 군대의 한반도 압박은 의외로 각국에 큰 변화를 불러 온다. 영락10년에 벌어졌던 병자년 전투에서 광개토대왕은 5만 군대를 파병해 왜에 포위되어 있던 신라를 구원한다. 신라를 침공한 왜는 기본적으로 가야와 친근하다. 가야--백제 라인은 광개토 대왕의 남정으로 한반도에서 그 힘을 크게 잃는다. 그리고 고구려 군대의 눈부신 활약에 가야 소국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신라에 의해 관리 받는 처지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이미 일찍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가야계는 한반도의 가야와 열도의 가야로 나뉘어진다. 그 이후 가야의 운명은 알다시피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본 열도에서 가야는 서서히 백제계에게 그 힘을 빼앗긴다.

고구려 속국이 된 신라는 나름대로 고구려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도모하기 시작하고, 가야는 정치체가 와해 된 후,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생존의 압박을 받는다. 정작 한반도 사서보다 일본 사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가야 역사. 야마토 정권은 자신의 원 고향에 대해 일정정도 연고권과 지분을 주장하면서 임나가야의 부흥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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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신라와 경계선이었던 낙동강 전선은 이미 백제 군대가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가야에 우호적이었던 백제 성왕 독려 하에 가야는 다시 왜와 손잡고 신라에 맞선다. 그리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다. 낙동강의 패자는 신라로 확정지어졌다.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던, 전성기에 낙동강 동부 서부, 지리산 넘어와 섬진강 유역까지 영토를 가졌던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서기 562년까지 500년 이상 존재한 것이 분명하다. 느슨한 연맹체의 정치체제냐 강력한 왕권 체제냐는 것도 구분하기 나름일 뿐. 한반도에서 생생한 고려 백제 신라의 쟁투 기간에 가야가 들어가지 않으면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지지 않는다.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으로만 통일의 주체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史實)누락이다.

문화에서 우륵의 가야금, 영토확장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김유신의 기여만으로 가야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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