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가야의 흥망성쇠, 순장문화

호요토호 2025. 3. 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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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부여족이 지배자였음이 분명하다. 신라는 김씨 왕족이 흉노계라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가야도 유물 부장품, 철기 마구, 갑옷 투구, 동복 등을 근거로 삼아 금관가야 지배자들이 3세기 경 북방 부여내지 선비족이 남하해 지배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강력한 철기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폭력 무장 집단, 그들은 현재 마피아나 조직폭력배처럼 굴었을까?

고령 지산동 32호분 투구 판갑옷,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북방 유목 민족 문화인 순장(殉葬)이 가야지역 고분군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북방 이주민인 지배자의 문화인지, 원래 고유한 변한, 진한의 문화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어쨌든 세계유산위원회는 가야 고분군을 16번째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한다고 하는데, 순장 문화가 그리 자랑스러운 문화일 수는 없다.

일치감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라진, 신라마저 지증왕 때 없앤 악습인 순장을 가야인들은 6세기 까지 지속해서 시행했다. 5세기 후반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고령 대가야 지산동 고분 44호분에서는 거의 40명이 묻혔다. 이런 사례를 들어 가야가 굉장히 후진적이었고, 어찌 보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10~20여개 소국으로 나누어져 각자도생을 기반으로 한 느슨한 연맹이란 점도 후진 지역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마치 생산성도 낮고 순이익도 많이 남기기 어려운 중소기업과 같다고 해야 하나. 고분 발굴 결과, 6세기 들어 순장용 돌방에서는 순장자가 나오지 않는 바, 순장하기로 한 이들이 도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전성기에 철정, 지금으로 따지면 반도체와 같은 비싼 물품들을 마구마구 파묻었던 지배자들이, 후기에 올수록 5분의1로 축소된 철기 제품을 부장품으로 묻는, 경제력이 약화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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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 계층, 심지어 여성들 까지도 병사로 활용했던 가야. 항상 병력 부족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후기로 갈수록 더 강화되는 순장. 일반 백성, 노비를 포함해서 지배자를 위한 헌신은 애초에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강력한 권력이든, 권력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살기 위해, 외부의 적과 맞서기 위해,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철광을 채취해서 제련하고 파는 그 과정에서, 백성을 순장 시켜 버리는 목숨 값이 별로였던 나라.

자체 문화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때, 결국 외부의 충격에 의한 다른 사회로의 병합. 이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역사의 의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역사. 가야, 구야, 임나, 가라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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