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드라이브 마이카 Drive My Car, 2021

호요토호 2024. 12. 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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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도 다양한 원인에 의해 우리의 인생은 상처를 입는다. 삶의 위기와 위선, 모순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또는 누구와 함께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그렇게 삶이 짊어질 심리적 고통의 원인에 집착하지 않는다. 간단히 전생과 업보, 원죄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개인의 탄생은 우연이고, 그 존재의 소멸은 필연이니까. 삶의 모순은 기본값이다.

다만 생을 이어가는 것은 주어진 사회와 문화에 갇혀 살 것인가, 자신이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엮고 서로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은 소중한 경험과 자산이 된다. 이질적인 존재와도 섞여서 사는 나약한 존재, 스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출처 : 다음영화

서로를 돌보는 존재로서 진화해온 인류가, 언제 부터인가 이 인간성의 기본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공리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이타주의, 혹은 상호 호혜적 이타주의, 거창한 사회원리로 설명하지 않아도, 길 가던 나그네가 배고픔을 호소하면 음식을 주고, 추위에는 비바람을 피할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었던가. 긴긴 밤을 동굴이든 야영지든 불을 피우고, 밤하늘에 펼쳐진 별자리로 이런 구라, 저런 구라를 치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사람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우리 잔인한 문명이 멀리 온 것도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인종, 민족, 국가, 국적의 차이든, 장애가 있든 없든, 언어와 문화가 다르는 말든, 눈 빛으로, 느낌으로, 표정으로, 우리는 따뜻한 인간임을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아주 쉬운 진실. 또한 온갖 핑계로 등한시 여기며 가볍게 여기며 사는 삶의 가치들. 심지어 욕망에 눈 멀어 아슬아슬한 벼랑위에 서있거나, 외줄 타기에 서 있는 인생 , 왜곡된 삶의 자세로 관계맺음이 서툰, 죄의식과 미안함을 이상하게 표출하는 사람 조차도 서로의 따뜻함이 필요한 것이니까.

또한 복잡하고 난해함에 삶의 진리와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비루하다. 안톤 체홉을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된다. 고상한 인문학이나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겉만 번드르한 삶에서 다소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서로를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힘은 바로 따뜻한 사람의 온기이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으며 서로 안아보고 쓰다듬어 주자, 인생 별거 없다는.

히로시마, 대한민국, 대만, 홋카이도, 청각장애인, 이재민, 어찌 그 힘든 역사 속에 사연들이 만만할 쏘냐. 마지막 엔딩 장면으로 비추어지는 한반도 분단의 철조망, 그 이름 자유로’.

애착의 실패, 관계의 실패를 평생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피드백이 되어주는 영화, 다소 긴 러닝타임 3시간, 비록 영화의 설정이 작위적이라 하더도, 그리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리 지루하지 않은 연출, 이렇게 영화 찍은 감독의 기재이다. 슬픔과 죄책감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나누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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