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란 말은 함부로 붙이지 못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정도는 되어야 한다. 역시나 거장의 ‘영화’이다. 극장과 영화의 위기, 그냥 극장의 위기이지 영화의 위기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러닝 타임 세 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정교한 영화적인 장치들, 클리셰를 넘어선 우아함이랄까. 한 과학자의 지적인 성취와 고뇌, 인생을 잘 표현해 냈다. 인류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닐스보어, 페르미, 괴델, 파인만, 이들의 노력과 성취는 그 자체로 문명의 진보, 발전의 역사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신음하는 민주주의 국가 구하기라는 메시지를 보이지만, 정작 노르망디 유럽 침공은 동 시간대에 벌어진 독일 국방군과 소련 적군이 벌인 혈투에 비하면 작은 작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는 당당히 선언한다. 미국의 역사가 곧 세계의 역사라고.
미국이 세계 강대국이란 것의 타이틀에는 학문의 자유가 바탕이 된다. 비록 매카시즘의 광풍에서도 진리와 진실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많은 과학 연구자들의 민주적인 실천이 미국의 파워를 설명해 준다. 또한 희곡 키파르트의 'J . 오펜하이머 사건에서'는 순수 과학의 순수성, 가치중립성에 대한 과학자 집단의 진실과 평화를 향한 고뇌를 승화시킨다. 이른바 과학과 앙상블을 이루는 인문학의 협업이 가능했던 나라 위대한 미국이다.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인가? 아니면 전쟁 시 무고한 양민을 죽인 전범인가? 오펜하이머 자신은 이른바 순수과학의 순수성에 회의를 품게 된 것은 맞다. 인류가 돌도끼를 사용한 이래로 과학의 가치중립성은 원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던가.
과학 기술과 국가 권력, 그리고 자본과의 상호작용, 일상의 생활을 지배한다. 과학기술이 낳은 폐해를 과학 기술, 그 자체로 치유할 수 있을까. 의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딴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손에 잡히는 컴퓨터 통신 돌도끼, 스마트 폰이 비유적으로 일종의 감정의 자동화기, 기관단총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른바 수학과 과학의 시대다. 교육과 학습을 통한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개인의 생각하는 힘과 연구자 집단들의 협업이 중요한 시대이다. 과학자 한 개인이든, 과학자 집단이든, 과학과 정치와 행정 교육을 고민하는 이들이든, 과학기술을 포섭한 국가권력과 자본이든,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위해 과학적 기술 자문을 넘어 인류의 평화 문제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한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는 이들 모두, 과학기술이 낳은 문제와 변화된 사회 환경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리라,
어렵고 지겨운 공부, 수학과 과학 앞에서 이 고생길을 먼저 닦아 놓은 저 거인들의 어깨에 한 번 서 본다는 차원에서, 수학과 과학의 학문 초행길에 서있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들, 대학원생들 진지하게 한번 볼만한 영화이다.
참고로 영화에서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에게 둘의 공통점을 말한다. 두 분의 공통점은? ‘둘 다 수학을 못하는 것’이라나. 저 천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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