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인간, 사회, 환경과 행복

‘욥’ 개인 행복을 주장하다

호요토호 2025. 3. 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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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질서와 조화이든, 삶에 주어진 수많은 제약과 구속들, 언제 부터인가 호모 사피엔스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 숙명을 깨달았다. 통제되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의 세계, 자연의 다른 이름, 신의 섭리 하에서 개인의 행복을 주장하는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권리로서 행복의 추구, 행복을 보장받아야 할 마땅한 것으로서의 인식의 큰 변화, 구약성경 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욥은 고대 중동 지역에서, 지금으로 따지자면 중소기업 사장 급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피부병에 걸리고, 재산인 양과 낙타들은 사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자식들은 죽는다. 이러한 삶의 시련에 욥은 당당히 신에게 항의한다. 나는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왔을 뿐 아니라, 성실히 일하고 노력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입니까?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는 누구인가, ‘나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삶에서 개인으로 살았던 이들은 거의 없다. ‘라는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 주어진 자연환경, 사회 환경, 공동체에 맞추어 내려오는 종교, 전통과 관습, 거의 자동화된 강제 문화 알고리듬에 묻혀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욥의 이야기 결말은 다소 싱겁다. 절대자의 변덕, 혹은 강한 의지에 순응하고 만다. 욥기의 교훈은 결국 군 말, 말아라, 변화무쌍한 현실 변화에 네가 이루고 성취한 것 별거 아니다. 그냥 운일 수도 있고, 알지 못하는 원리에 의해 그냥 선택 결정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산신에서 전쟁의 신으로, 유일신으로 변신 중이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무명씨여호와는 무소불위의 권능, 절대 권력자를 자처한다. ‘', 한 개인이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 입장에서 마땅치 않다. 개인의 운명은 신의 섭리, 신이 부여한 질서, 숙명과 굴레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여러 모로 속편하다. 개인의 노력에 의한 성취, ()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면, 나머지 사회구성원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몫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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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 CEO가 있다면, 그 성공에 개인의 재능, 노력, 실력은 얼마나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 또는 그 성공에 급여를 받고 일한 사람들,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해 준 이들, 사업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제공한 국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납세자들의 기여는 얼마로 처야 할까. 이익을 내는 기업의 세금과 CEO 소득에는 얼마나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정의 인가? 그 세금으로 행복하게 해달라는 국민의 요구는 어디까지 정당한 것일까?

욥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에게 항의 했지만, 이후 편안하지 않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하는 수많은 의 등장은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될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그렇다 해도 인류 역사에서 기록된 문서에서 최초로 개인의 행복을 주장한 것은 의의가 있다. 근대사회 이전, 수 천년 전 중동지역에 살았던 은 행복의 의미와 기준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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