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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는 행복의 철학자, 에피쿠르스

호요토호 2025. 3. 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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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사피엔스, 밀림 숲과 해안가를 어슬렁거리며 채집생활을 할 때, 운 좋게 꿀 통을 발견하거나, 맹수가 사냥하다 남긴 고기 등을 발견했을 때, 남다른 행운에 즐거워했을 것이다. 운 좋은 것, 행운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보편적이다. 복권당첨과 같은 경우 예기치 않은 행운이 다가올 때, 모든 사람들은 좋아한다. 시대 장소를 넘어 사람들이 야바위, 도박을 좋아하는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 행복의 기준은 쾌락, 긍정적 마음을 뜻한다. 쾌와 락, 즐겁고, 편한 것, 좋은 것, 기쁜 것, 결혼식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던가. 때가 되면 성선택을 하고 사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생물학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진화과정에서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생존에 유익하고 번식확률을 높인다. 달달한 것을 먹으면 행복해지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다. 칼로리가 높은 단 것을 먹어야지 여분의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만과 당뇨와 같은 성인병 유발 걱정을 전근대 호모 사피엔스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항상 칼로리는 부족했었으니까.

에피쿠르스, 출처 : 위키피디아

기분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것이 설탕이든 마약성분이든, 환각 성분이 든 약초나 버섯, 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삶의 목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나, 삶의 목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면 왠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정신적인 행복,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라는 의미에서 행복을 쾌락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쾌락과 행복, 본질적인 의미에서 같은 의미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적어도 에피쿠르스에게는 그렇다.

생물학적 욕구, 정신적 욕망 추구는 어느 정도 모두 중독과 관련 있다. 중독은 극단적인 지나친 추구를 의미하는 바, 절제와 중용이 행복의 기준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단기적 쾌락, 장기적 행복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금욕을 통한 행복 주장이 아예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순간적인 잠깐의 기분 좋음, 장기적 불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신적 행복 추구이다.

헬레니즘 시대,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에피쿠르스이다. 철학에서 에피쿠르스 학파를 소개할 때, 쾌락주의hedonism라고 해서 마치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에피쿠르스와 그를 따르는 에피큐리안들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현대 경제학용어로 한계효용이 체감함을 직관하고, 이를 실천했다. 소량의 포도주와 빵으로 그들은 만족했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우애의 철학, 현자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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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영원하지 못할 기쁨, 에피쿠르스는 정도가 약하더라도 육체적 쾌락 보다, 돌봄과 교감, 우애의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 즉 짧은 순간의 강렬한 쾌락, 헛된 행복을 쫒는 것 보다 지속적이며 오래가는 마음의 평안,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하기 편한 정신적 행복을 권유한다. 이처럼 행복은 소박한 자기만족에 있다는 간단명료한 사실은 인정해야 하겠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행복의 기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인간은 타고난 본성도 조금씩 다른데다가 성별, 나이, 계급, 직업, 사회적 지위, 문화와 전통, 관습, 주어진 자연환경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는 에피쿠르스가 추구한 보편적 행복, 굳이 말로 설득해야 아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선사인이든, 고대인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최첨단 스마트 기기를 장착한 현대인이든, 모두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다 인정하고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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