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인간, 사회, 환경과 행복

아리스티포스의 쾌락주의 hedonism

호요토호 2025. 4. 3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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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즐겁게 먹고 마시고, 여행 혹은 관광을 즐기고 삶을 즐겨라!’ 행복에 대한 평가, 행복의 기준으로 미식가나 주색가의 행복, 도파민에 대한 선구적인 성찰, 카르페디엠(CARPE DIEM)의 원조 가르침,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의 갈망하는 행복이다. 이들 모두는 사실은 아리스티포스주의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소크라테스가 생존했을 당시에 이미 그리스인들은 쾌락이 주는 행복에 대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생각을 해왔다. 대표적으로 쾌락을 긍정한 이가 아리스티포스(B.C.435-355, 키레네학파의 창시자)였다.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그는 쾌락만이 좋음, ()이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데 행복이 있다고 말하였다.

아리스티포스의 헤도닉 행복은 즐거운 시간을 경험하는 주관적 느낌에서 비롯한다. 육체에서 비롯된 감각적 쾌락은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쾌락을 앞서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즐거움, 운동 후의 상쾌함,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 마사지나 요가와 같은 가벼운 운동을 통한 평안 등이 육체적 쾌락이다. 이러한 쾌락은 특정 신체 부위나 감각 기관의 자극을 통한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욕구 충족과 관련이 있다. 그는 감각적 쾌락, 육체적 쾌락은 부드러운 운동으로 정의 내렸는데, 고통은 거친 운동이다. 부드러운 운동이라는 것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해하면 될 듯 싶은 데, 대표적으로 성애(性愛)가 그렇다.

아주 단순하게 아리스티포스가 무한한 욕구 충족을 긍정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티포스는 각각의 쾌락을 주는 활동을 긍정했지만, 다양한 좋은 것들에 대한 가치 진단과 판단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티포스와 그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덕은 지혜라는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혜를 통해 쾌락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 즐길 수 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덕과 같은 견해이다. 지혜와 철학을 통해서 쾌락에 대한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고, 쾌락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 억제와 자기억제가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 점은 후대의 에피쿠르스와 생각이 다른 듯하다.

아리스티포스의 좌우명은 "소유하지만 소유당하지 않는다"였다. [출처 : 다음 백과]

전해지는 일화로, 아리스티포스는 코린트시의 라이스라는 고급 창녀와 동거했다. 그들의 동거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그는 사창가에서 매춘을 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 “나는 라이스를 소유하지만, 라이스는 나를 소유하지 않는다.” 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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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부유하나, 공부하기 싫어하고, 정치적 출세내지 공동체에 기여하는 시민으로서의 삶과 일치감치 담쌓은 부자집 귀족 도련님의 행복, 아리스티포스의 행복을 일방적으로 폄하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아리스티포스가 경계한 쾌락의 노예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부, 재산,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항상 소수 특권 계층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복을 추구하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육체적 쾌락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뿌리를 이룬다.

어찌 보면 지혜와 철학을 통한 욕망의 절제를 통한 육체적 쾌락, 간단하고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행복 추구가 역설적으로 쉽기 때문에, 쉽지 않는 행복의 기준이 되 버렸다. 항상 경제적 결핍 속에 살아온, 또는 상대적 결핍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사는 이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원래 그러하기도 한 행복. 인간의 뇌에 쾌락과 감각적 만족을 제공하는 도파민 지향 문화가 현대인의 생활 중심이 된 것에 대해 아리스티포스는 어떻게 생각할까. 오히려 경고의 알람을 울릴 것 같다. 욕망의, 쾌락의, 도파민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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