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인간, 사회, 환경과 행복

목적론적 세계관과 행복

호요토호 2025. 4. 2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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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왜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식물이 자라기 위해 비가 온다고 설명한다. 식물은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서 왜 자라는가. 사람이 먹을 수 있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이유로 든다. 오늘날 현대과학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넌센스에 가깝다. 수분과 양분은 사람과 동물이 살 수 있도록 하는 필요한 조건에 불과하다. 물과 에너지원이 없으면 동식물과 인간, 생명체는 생존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물과 에너지원이 생명체 생존을 책임지고자 하는 의도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할 리가 없지만, 비슷하게 세균을 유익균과 유해균으로 나누는 것도 그렇다. 그냥 결과가 어떤 세균은 몸속에서 좋은 활동을 할 뿐이고, 어떤 세균은 부패와 감염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결국 결과에 불과한 현상을 다시 원인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 의도로 생각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은 어떤 통일된, 전체론적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통일된 우주와 자연의 질서란 결국 신 GOD의 의도와 목적이다. 하나의 원리, 하나의 질서, 하나의 진리, 하나의 설명,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유일신이며, 목적 그 자체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 목적은 행복이다. 논리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결국 신과 자연의 질서, 의도에 따라 주어진 이성을 활용하며 지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의 목적에 충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면 신의 세계, 하나의 진리와 원리에 더 가까이 가는 것, 합일(合一)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접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부동의 원동자가 같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동의 원동자를 생각해 내기 위해 형상과 질료’, ‘가능태와 현실태’, ‘접촉기동자와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가 동원되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 되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지적으로 게으르고 모자란 사람들은 철학과 행복을 같이 생각하기는 훨씬 어려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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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이 세상에는 자신의 존재, 탄생의 이유를 신에 의해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찾는 과정에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이 많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불확실하고 자기 고집에 불과한 생각을 모든 사람들, 보편의 목적으로 일반화 시키기거나 강요하는 것은 구조적 폭력에 가깝다. 생각해 보라,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신에 의해 목적을 부여받고, 남성에 봉사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도 인류는 남성 여성으로 나뉘어 서로 열심히 투쟁하고 있다.

인생에 목적이 있을까. 모든 인간은 행복을 목적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보편타당한 것일까.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복제해 남기는 것이 생명체 DNA의 목적이기는 한데. 원치 않게 태어난 한 개인이 목적으로 여기는 가치나 의미로서 행복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행복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행복한 것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 얼마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그릇된 목적인 행복을 소유함으로써 참다운 목적인 의무를 얼마나 잊고 있는지.”<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더 클래식 2012>

족욕을 하며 사색, 명상을 즐겨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졸음을 쫒기 위해 청동 구슬을 항상 손에 쥐었다고 한다. 졸면 그 구슬이 떨어져 잠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장치이다. 그런데 억지로 사색과 명상을 하기보다, 졸음이 오면 낮잠을 한바탕 늘어지게 자는 것이 더 행복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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