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차치리의 우화,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設)>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乃反市罷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信自也. -外儲說左上)
정나라 차치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신발을 사러 장에 가기 위해 자신의 발 크기를 본으로 떴다.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의 모양을 그린 것이 탁度)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정작 장에 갈 때 그만 탁(度)을 집에 놓고 갔다. 먼 길을 돌아 집에 가서 탁을 가지고 장에 다시 왔을 때, 장은 파하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는 사람이 말하기를 “탁을 가지러 집에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면 될 것인데.” 그러자 차치리가 말하기를 “아무려면 발이 탁度)만큼 정확할까요?”

신영복 선생은 관념(탁)보다 더 소중한 실재(발)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끌어왔다. 발보다 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제에서 분리 유리된 관념을 중요시한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한비자도 차치리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과연 차치리는 바보이고, 탁보다 실재 발 크기가 더 중요한 것일까.
탁은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이다. 이데아의 발상법은 다음과 같다. 삼각형 내각이 180도인 삼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미세한 펜으로 선을 그어도, 레이저 빛을 쏘아도 완벽한 직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에서 논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이데아, 즉 수의 세계는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관념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이다. 즉 모양, 본에 불과하다.
눈 오고 비 오고, 올리브나무가 열매를 맺고, 곡식이 익고, 달이 차고 기울고, 천둥 번개 치고, 태풍이 그리스 인들은 자연현상에서 신(神)을 생각해 낸 다음, 그 신 다음에 본질인 원질, 아르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이 수(數 아르케 내지 이데아)로 이루어졌다는 피타고라스의 생각, 놀랍지 않은가. 변하는 현상 속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 데모크리토스는 아톰 ‘원자’라는 것을 생각해 냈으니, 대단한 인간 사고의 혁신이었다.
플라톤이 세운 아테네의 아카데미에는 ‘수학을 못하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 있다고 한다. 또 플라톤의 책 ‘국가’에서 지도자가 될 자는 30세 이전에 높은 수준의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공지능과 로봇 뿐이랴, 과학과 기술 공학의 세계는 물리와 화학, 그리고 결정적인 수학이 결합한 결과이다. 이 모든 공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에게 돌려 마땅하다. 또는 아르케, 물이든 불이든, 공기이든 땅이든 순수한 사고로 수의 세계를 탐구하고 원자를 떠 올린 그리스 인들이야 말로 현대 문명의 아버지들이다.
국가란 것도 이데아, 관념일 뿐이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는 법이라는 알고리즘이 작동한다. 수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의미하는 알고리즘. 세상은 시스템의 작동원리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져있다. 어찌 보면 사회나 문명도 거대한 알고리즘이고, 우리의 욕구와 욕망을 지배하는 DNA도 알고리즘이다. 우리가 알고리즘의 결과인 셈이니까, 스스로 알고리즘을 짜서 AI와 로봇을 구동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할 쏘냐.
알고리즘에 이끌려 이리 저리 쇼핑을 하는가. 알고리듬이 추천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주로 보는가. 그러니 자유의지란 애초에 없는 것인가. 한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인류문명이든 우리는 어디든가 향해서 가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으면 ‘나는 모르지, 내비게이션 알고리즘에게 물어 보세요’라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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