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이 낭자한 활극이 아니다. 영화는 일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새로운 시대인 메이지 유신 이전, 몰락하는 한 하급 사무라이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잔잔하고 차분하다. 자애로운 아버지이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꾀죄죄한 가장, 항상 칼같이 황혼에 퇴근한다고 해서... 별명이 황혼
황혼은 아름답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철학은 이를 뒷북치듯이 그 시대를 정리하는 것이 본업이자 역할이며, 한계라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철학은 그렇다 쳐도, 한 개인에게 세월이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시대변화에 한 박자씩 늦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무라이, 한 때 백제 싸울아비가 어원으로 오해되어, 일본이 내세우는 무사도 정신의 근원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설득력 없다.
사무라이는 한자로 봉시(奉侍)라고 하는데, 훈독인지 음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침공했을 때, 지방의 영주계급 내지, 중간계급 무사로 전쟁에 참여한 자들을 일컫던 말이라고 한다. 뜻은 받들고 모시는 사람이니까, 사무, 서무 소무, 섬어, 사부 등등의 어원으로 한반도 남부지방 고어 일 수는 있겠다.
영화는 가난하고 고달픈 샐러리맨으로 상처한 중년의 직장인, 창고지기이다. 그리고 그에게 드디어 칼을 휘두를 기회가 오고, 이 사무라이는 고심한다. 맞겨진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 영화는 일본사회 중앙 정치의 변동과 이에 따라 변화하는 지방자치단체 번(藩)과 계급사회의 동요를 보여준다. 한 시대가 끝나간다는 의미에서 황혼이기도 하다.
주인공으로 연기한 연기자, ‘사나다 히로유키’ 담담하면서도 속정 깊어 보이는 그 연기, 어디서 봤나 했더니, 톰크루즈 주연 라스트 사무라이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여주인공은 유명한 '미야자와 리에'이다.
인내,忍耐 주인공 세이베이는 참고 또 참는다. 전통적인 일본인 아버지 상 인가보다. 아니다 우리 아버지들도 그랬다. 참는 다는 것은 신중하다는 것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간다는 덕목이다. 진중과 신중해야지, 경거망동은 바람직하지 않는 법,
우리들의 오감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형형색색, 교언영색이 난무하고, 자기 물건 사달라고 이렇게 광고가 판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필요한 소양이 인내이지 싶다. 너무 참으면 화병이 되지만, 순간순간의 기분과 감정의 표출을 타인에게 과감하게 하는 것 또한, 일종의 한국사회 사회적 병이고 개인의 불행이다.
영화는 남녀 간의 로맨스,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잔재미가 있는 영화다. 사랑을 할 듯 말 듯, 마음을 줄 듯 말 듯, 서로를 생각하는 연정이 연결될 듯 말 듯...
아! 우리네 인생에서 노골적이며 시원시원한 감정표현의 사랑보다 일견 답답해 보이고 쑥맥인 듯한 사랑이 더 예뻐 보이는 것은 왠 일인가. 썸탄다고 하던가. 썸하고는 좀 다른, 충분히 좋아함을 강하게 느끼고 표현하는데, 기다리고 참고 기다린다. 그 미학이랄 것 까지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섹스어필하고 유혹하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부부의 애정도,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친구간의 우정도, 사제 간의 정도, 연인간의 감정도.... 이제 저런 속정 깊은 감정들이 사라진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서 황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