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사회/행복의 의미와 기준

[제4편] 질문하는 욥, 운명에 맞서다

도량분계 2026. 1. 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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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욥, 운명에 맞서다

 

https://youtu.be/0XqDvgw27F0

신이 만든 질서와 조화이든, 삶에 주어진 수많은 제약과 구속들. 언제부터인가 호모 사피엔스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와 숙명을 깨달았다. 통제되지 않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의 세계. 자연의 다른 이름인 신의 섭리 하에서 개인의 행복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이채로운 일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권리로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보장받아야 할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그 거대한 변화의 씨앗, 그것은 구약성경 욥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욥은 고대 중동 지역에서, 지금으로 따지자면 성공한 중소기업 사장 급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처럼, 그는 성실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끔찍한 피부병에 걸리고, 전 재산인 양과 낙타들은 사라지며, 집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자식들마저 죽는다. 이러한 삶의 처참한 시련 앞에 욥은 당당히 신에게 항의한다.

나는 정직하고 착하게 살아왔을 뿐 아니라, 성실히 일하고 노력했습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입니까?”

근대 이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는 누구인가, ‘나의 행복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삶에서 온전한 개인으로 살았던 이들은 거의 없다. ‘라는 자의식이 크지 않았고, 주어진 자연환경과 공동체, 그리고 거의 자동화된 강제 문화 알고리듬에 묻혀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욥은 의 행복을 권리로서 주장하면서, 신의 질서, 혹은 신의 무질서, 내 삶의 안정과 안녕을 해치는 세상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세간의 상식에는 벗어난 것이라서, 욥의 친구들은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며 인과응보를 강요한다. 심리학에는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면, 그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래야만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레이크 욥기 삽화

인생의 길흉화복과 순수한 신앙과의 관계,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가? 세상의 모든 불행은 개인의 잘못 때문인가? 시스템(신의 정의)이 망가진 것인가, 개인이 잘못한 것인가? 신이 전능하다면 왜 의인의 고통을 방관하는가? 신이 훗날 인간의 몸(예수)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통을 겪은 것은, 어쩌면 억울하게 고통 받았던 욥, 그리고 수많은 인간들에게 보내는 신의 뒤늦은 사과이자 '응답'이라는 칼 융의 주장까지. 생각할 거리는 많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 결말은 다소 싱겁다. 마침내 폭풍우 속에서 나타난 신은 고통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신, 우주 만물의 광대하고 신비로운 창조 질서에서 인간의 좁은 도덕적 인과율로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섭리가 있음을 설교한다. 신은 기계적인 교리를 읊던 친구들 대신 치열하게 진실을 요구했던 욥의 정직함을 인정하며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내려준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깨닫고 겸허히 순응한다.

욥기의 냉혹한 교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군말 말아라. 변화무쌍한 현실 변화에 네가 이루고 성취한 것 별거 아니다. 그것은 그냥 운일 수도 있고, 알지 못하는 원리에 의해 그냥 선택 결정된 것일 수도 있다.” 여호와는 산신에서 전쟁의 신으로, 그리고 유일신으로 변신 중이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여호와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절대 권력자다. 그런 신 또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욥이라는 한 개인이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개인의 운명은 신의 섭리, 신이 부여한 질서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게 만드는 편이 통치자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속편하다. 만약 성취와 부가 온전히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노력해도 가난한 대다수 민중의 분노가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과 통치자에게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알 수 없는 숙명 탓으로 돌려야 체제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부와 성공이 100% 그 사람의 노력 덕분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국가는 그 부에 대해 세금을 물리거나 간섭할 명분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내 노력으로 내가 번 건데 왜 내놓으라 하느냐'는 개인의 항변을 막기 위해서라도, 통치자는 성공의 원인을 신의 은총이나 사회적 시스템의 몫으로 돌려야만 징세와 재분배의 정의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마이클 샌델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을 떠올려본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농구라는 스포츠가 없던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을까?” 조던의 재능은 시대라는 을 만나 비로소 빛을 발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처럼, 어쩌면 부자라서 착한 게 아니라, 돈이 다리미처럼 구김살을 펴주어서착해 보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 CEO가 있다면, 그 성공에 개인의 재능과 노력은 과연 몇 퍼센트나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야 할까. 그 성공을 위해 급여를 받고 일한 사람들, 상품을 소비해 준 이들, 사업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한 국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납세자들의 기여는 얼마로 쳐야 할까.

이익을 내는 기업과 CEO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개인의 것을 빼앗는 폭력인가, 아니면 운과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만큼을 돌려주는 정의인가? 그 세금으로 행복을 보장해 달라는 국민의 요구는 어디까지 정당한 것일까?

욥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 신에게 항의했지만, 이후 편안하지 않고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하는 수많은 현대의 욥들의 등장은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될 근대 이후의 일이다. 비록 신의 섭리 앞에 무릎 꿇었을지라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내가 행복해야 할 이유를 신에게 따져 물었던 욥의 외침은 그래서 의의를 갖는다. 수천 년 전 중동 지역에 살았던 욥은, ‘노력하면 성공 한다는 능력주의의 신화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행과 싸우며 행복의 의미를 고민하는 모든 현대인들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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