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시험에 합격했다고 치자. 그 기쁨은 평생 갈 것 같지만, 기껏해야 2~3달, 최대 6개월이 최대 기간이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자유롭게 해외여행, 세계 여행을 마음껏 다니는 것이 진짜 행복일 것도 같다. 그러나 정작 그 자유를 원 없이 누린 사람들 모두는 결국 자기 고향과 집이 더 좋다고 한다. 어차피 영원하지 못할 기쁨, 에피쿠르소는 정도가 약하더라도 육체적 쾌락 보다, 정신적 쾌락, 돌봄과 교감, 우애를 추구한다. 즉 짧은 순간의 강렬한 쾌락, 헛된 행복을 쫒는 것 보다 지속적이며 오래가는 마음의 평안, 정신적 쾌락,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하기 편한 행복을 권유한다. 이처럼 행복은 소박한 자기만족에 있다는 간단명료한 사실은 인정해야 하겠다.

밴드오브 브라더스, 전쟁터에서 느끼는 특별한 전우애처럼 소규모 조직에서 느끼는 우정부터 프랑스 국가와 나폴레옹 황제를 극단적으로 추종했던 니콜라 쇼뱅이 대표하는 애국애족 쇼비니즘까지.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행복에는 다른 존재들과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느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또 다른 행복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대중 스타에 대한 열광과 동경이 신과의 합일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도 않는다. 엑스타시는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무엇이든 집단이 선 보이는 더 큰 마음, 정신을 향한 합일 지향, 정치집회든 종교집회든, 콜로세움에 운집한 군중의 열기와 광기에 파 묻혀 있을 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은 행복을 준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한국의 길거리 응원 문화, 카니발 축제에서 느끼는 행복이 그러하다.
즉 애국 애족, 해방과 혁명, 영성, 승리에 대한 열망, 명분은 다양하지만, 다 같이 행동을 맞추어서, 춤을 추거나 소리 지르거나, 합창하거나 구호를 외친다. 기도하거나, 욕하거나 증오하거나 군중과 하나됨을 느낄 때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 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지향, 공동체와 공동체 구성원들과 연대감과 유대감, 특히 자신이 공동체에 기여를 할 때 느끼는 이타주의 실천에서 오는 행복감이 자리한다.

그 반대 방향, 집단과 군중으로부터 탈피해서 정신 내면으로 어떤 몰입을 통한 행복도 가능하다. 자기만족 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정신적 체험을 추구하는데 주로 종교인과 예술인, 드물게 스포츠 무도인들이 느끼는 행복이다. 기도이든 명상이든,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에서 신비주의 전통이 이어져 온다. 몰입에서 오는 체험, 정신의 집중에서 오는 어떤 정신적 흥분 체험이 그러하다. 수도원이나 산속 사찰, 동굴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이 시끄럽고 번잡한 도시의 클럽에서 오는 엑스터시 보다 강렬할 수도 있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과 같은 알쏭달쏭한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초 집중 상태, 정신적 긴장과 몰입, 시간이 정지되어 있거나, 느리게 가는 체험, 그 자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어찌 보면 뇌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적 전기 신호가 일으키는 착각인가. 아니면 영성(spirituality)개발과 깨달음의 세계는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이 성찰하며 제시한 인류가 처한 위기, 병든 개인, 병든 사회, 병든 지구를 치유하는 최후의 보루인가.
세상 모든 행복들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다소 기이하고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좀 더 넒은 마음으로 타인의 행복을 이해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만의 행복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 지도를 그려나가는데 참고할 문명의 지혜, 축적된 인류의 지식을 펼쳐 볼 줄 아는 열린 마음 또한 필요하다. 행복은 개인 나름의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옮음에 대한 기준과 요구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좋음의 기준 또한 자연이 부과한 본성, 축적된 사회문화의 흐름, 법과 제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또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록 마리화나와 같은 연성 마약에 대한 찬성논의가 있지만, 제도적으로 마약이 일상생활에서 허용 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각자의 처지, 사회의 기준과 조건에 맞추어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겠지만, 원래부터 배운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지겹고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다가 시험 점수 경쟁은 목적과 가치를 뒤 엎어 버린다. 또 학위를 딴다고 해서 과거만큼 능력과 실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지도 못한다. 꽉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사회에 나갈 때,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지도 한 장,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설명서 한 장 없다. 그래서 교육에서 지향하는 중요한 여러 덕목이 있지만,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는, 또는 자신의 행복 지도를 그릴 용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행복, 파랑새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철창 안에서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이나 인생의 미지의 길에서 이리저리 탐험해 보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나, 낯선 것에서 또는 새로운 것에서 행복을 찾아 다녀봐야, 또는 특별한 경험,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 그 경제력을 삶의 목표로 살아가도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두가 잘 살고, 다 같이 행복한 사회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제는 모두가 또는 다수가 집단을 이루어 그 무언가를 함께 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소수가 집단을 이루어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행복의 행선지가 각각 다른 이들이 티켓을 끊고 한 배 승선한 꼴이다. 적어도 그 배가 산으로 가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좌표 목적지로 가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 배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 기능은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배가 가든 안가든,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의 가능성을 이 배 안에서 이리저리 탐험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배의 구조, 그 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켓사라 사라, 될 것은 어차피 되기 때문이고, 카르페디엠,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니까.
**생각해 볼 거리 Thought Prompts**
1. 나를 '초 집중'하게 하여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활동은 무엇인가요?
2. 인생이라는 배 위에서 타인이 정해준 목적지가 아닌, 내가 가고 싶은 좌표는 어디입니까?
3.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의 정답’에서 벗어나 당신만의 행복 지도를 그리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바꾸고 싶은 생활 습관은 무엇인가요?
4. 인간이 타인을 돕는 이타적인 행동이나 기여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5. 집단에 소속되어 열광하는 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개인의 주체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하는가.
6. 종교나 예술 분야에서 말하는 몰입의 경지가 현대인의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다고 믿는가.
7. 나만의 행복 지도를 그리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기준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8. 인생에 정해진 설명서가 없다면 미지의 길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불안을 어떻게 행복의 가능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통합사회 > 행복의 의미와 기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5편] 소크라테스의 행복 : 사회적 혼란 속에서 죽음으로 증명한 영혼의 탁월함과 진정한 자유 (0) | 2026.01.30 |
|---|---|
| [제4편] 질문하는 욥, 운명에 맞서다 (1) | 2026.01.24 |
| 과잉의 시대, 노자가 말하는 ‘빼기의 행복’ (2) | 2025.09.29 |
| [제10편] 견유학파의 금욕주의 행복 (1) | 2025.05.07 |
| [제2편] 행복의 상대성과 조화, 다보탑과 석가탑이 마주 보는 이유 (1) | 2025.03.23 |